
이 판결에는 대법관 민유숙, 대법관 노정희의 보충의견이 있다. 위와 다른 취지의 종래 대법원 판례를 모두 변경했다.
피고인(36)은 2014년 7월 중순경 스마트폰 채팅 앱을 통해 알게 된 14세의 피해자에게 자신을 ‘고등학교 2학년생인 김OO’이라고 거짓으로 소개하고 채팅을 통해 피해자와 사귀기로 했다.
피고인은 2014년 8월 초순경 피해자에게 ‘사실은 나(김OO)를 좋아해서 스토킹하는 여성이 있는데, 나에게 집착을 해서 너무 힘들다. 죽고 싶다. 우리 그냥 헤어질까’라고 거짓말하면서 ‘스토킹하는 여성을 떼어내려면 나의 선배와 성관계하면 된다’는 취지로 이야기했다.
피해자는 피고인과 헤어지는 것이 두려워 피고인의 제안을 승낙했고, 피고인은 마치 자신이 김OO의 선배인 것처럼 행세하며 피해자를 간음했다. 이로써 피고인은 위계로 아동ㆍ청소년인 피해자를 간음했다.
‘위계’라 함은 행위자의 행위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피해자에게 오인, 착각, 부지를 일으키게 하여 이를 이용하는 것을 말한다.
원심은, 위계에 의한 간음죄에서 위계의 의미에 대해 “행위자가 간음의 목적으로 상대방에게 오인, 착각, 부지를 일으키고는 상대방의 그러한 심적 상태를 이용하여 간음의 목적을 달성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여기에서 오인, 착각, 부지란 간음행위 자체에 대한 오인, 착각, 부지를 말하는 것이지, 간음행위와 불가분적 관련성이 인정되지 않는 다른 조건에 관한 오인, 착각, 부지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라고 보아야 한다.”라는 대법원 2001. 12. 24. 선고 2001도5074 판결 등(이하 ‘종전 판례’)의 판시에 따라, 피해자가 간음행위와 불가분적 관련성이 인정되지 않는 다른 조건에 관하여 피고인에게 속았던 것뿐이므로 피고인의 간음행위는 형법 등에서 처벌대상으로 규정하는 위계에 의한 것이 아니라고 인정해 이 사건 공소사실을 무죄로 판단했다.
이 사건의 쟁점은 형법 등이 처벌대상으로 규정하는 위계에 의한 간음죄에서 위계의 의미를 위와 같이 해석한 종전 판례가 유지될 수 있는지 여부가 원심판결의 당부를 가리는 쟁점이 된다.
성적 자기결정권은 스스로 선택한 인생관 등을 바탕으로 사회공동체 안에서 각자가 독자적으로 성적 관념을 확립하고 이에 따라 사생활의 영역에서 자기 스스로 내린 성적 결정에 따라 자기책임 하에 상대방을 선택하고 성관계를 가질 권리로 이해된다(헌법재판소 2002. 10. 31. 선고 99헌바40 등 결정 참조). 여기에는 자신이 하고자 하는 성행위를 결정할 권리라는 적극적 측면과 함께 원치 않는 성행위를 거부할 권리라는 소극적 측면이 함께 존재하는데, 위계에 의한 간음죄를 비롯한 강간과 추행의 죄는 소극적 성적 자기결정권을 침해하는 것을 내용으로 한다(대법원 2019. 6. 13. 선고 2019도3341 판결 참조).
이 사건 피해자는 14세로서 19세 미만의 자를 일컫는 청소년성보호법상 아동ㆍ청소년에 해당한다.
아동ㆍ청소년이 외관상 성적 결정 또는 동의로 보이는 언동을 하였다 하더라도, 그것이 타인의 기망이나 왜곡된 신뢰관계의 이용에 의한 것이라면, 이를 아동ㆍ청소년의 온전한 성적 자기결정권의 행사에 의한 것이라고 평가하기 어렵다.
대법원은 이와 달리 위계에 의한 간음죄에서 행위자가 간음의 목적으로 상대방에게 일으킨 오인, 착각, 부지는 간음행위 자체에 대한 오인, 착각, 부지를 말하는 것이지 간음행위와 불가분적 관련성이 인정되지 않는 다른 조건에 관한 오인, 착각, 부지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라는 취지의 종전 판례인 대법원 2001. 12. 24. 선고 2001도5074 판결, 대법원 2002. 7. 12. 선고 2002도2029 판결, 대법원 2007. 9. 21. 선고 2007도6190 판결, 대법원 2012. 9. 27. 선고 2012도9119 판결, 대법원 2014. 9. 4. 선고 2014도8423, 2014전도151 판결 등은 이 판결과 배치되는 부분이 있으므로 그 범위에서 이를 변경하기로 한다고 했다.
대법원은 "피해자가 위와 같은 오인에 빠지지 않았다면 피고인과의 성행위에 응하지 않았을 것이다. 피해자가 오인한 상황은 피해자가 피고인과의 성행위를 결심하게 된 중요한 동기가 된 것으로 보이고, 이를 자발적이고 진지한 성적 자기결정권의 행사에 따른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 따라서 피고인은 간음의 목적으로 피해자에게 오인, 착각, 부지를 일으키고 피해자의 그러한 심적 상태를 이용하여 피해자를 간음한 것이므로 이러한 피고인의 간음행위는 위계에 의한 것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럼에도 원심은 이와 달리 앞서 본 바와 같은 이유로 이 사건 공소사실을 무죄로 판단했다. 이러한 원심판결에는 위계에 의한 간음죄에 관한 법리를 오해하여 판결에 영향을 미친 위법이 있다. 이를 지적하는 검사의 상고이유 주장은 이유 있다"고 판단했다.
◇대법관 민유숙, 대법관 노정희의 보충의견
이 사건 쟁점과 관련한 최근의 법개정 상황에 비추어 전원합의체 판결의 의미를 보충하고자 한다.
가. 성폭력범죄를 규율하는 형법, 성폭력처벌법, 청소년성보호법은 역동적으로 개정되었으며 특히 폭행ㆍ협박에 이르지 않는 수단에 의한 성폭력범죄에서 처벌을 강화하고 피해자를 보호하려는 경향이 뚜렷하게 확인된다. 이는 성폭력범죄를, 피해자의 항거를 불능하게 하거나 현저히 곤란하게 할 정도의 폭행ㆍ협박 즉 피해자의 의사가 완전히 제압될 수 있는 물리적 강제력을 수단으로 하는 것으로 상정하였던 전통적 사고의 틀에서는 지금 우리 사회에서 발생하는 성폭력범죄에 제대로 대처할 수 없다는 문제의식에서 비롯되었다.
형법의 2018. 10. 16.자 개정으로 업무ㆍ고용을 매개로 보호감독 하에 있는 사람을 위계 등으로 간음한 경우 법정형의 상한이 징역형 기준 종전의 5년에서 7년으로, 구금된 사람을 간음한 경우 법정형의 상한이 종전의 7년에서 10년으로 각 상향되었다. 성폭력처벌법은 같은 보호대상을 추행한 행위를 처벌하는데, 같은 일자 개정으로 법정형의 상한이 징역형 기준 종전의 2년 또는 3년에서 3년 또는 5년으로 상향되었다.
직장ㆍ조직 내부에서 의사결정권ㆍ업무수행지시권 등을 매개로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는 권력형 성폭력사건이 피해자 개인은 물론 사회에 심대한 악영향을 미침에도 이를 상대적으로 낮은 형으로 처벌할 수밖에 없어 부당하였다는 취지에서 이해할 수 있다.
나. 특히 주목할 만한 법개정은 13세에서 15세 사이의 아동ㆍ청소년의 성을 보호하는 규정이다. 청소년성보호법의 2019. 1. 15.자 개정으로 19세 이상의 사람이 위 아동ㆍ청소년의 궁박한 상태를 이용하여 간음ㆍ추행한 행위를 처벌하게 되었다가(청소년성보호법 제8조의2), 형법의 2020. 5. 19.자 개정으로 19세 이상의 사람이 13세에서 15세 사이의 아동ㆍ청소년을 간음ㆍ추행하면 수단의 강제성 유무 및 정도를 묻지 않고 처벌하게 되었다(형법 제305조 제2항). 이 사건 피해자는 14세, 피고인은 36세이므로 위와 같은 개정법 하에서는 수단을 불문하고 처벌대상이 된다.
성개방과 성상품화 풍조가 만연하면서 사회문화적으로 아동ㆍ청소년에 대한 성착취의 위험이 증가하고 있음에도, 아동ㆍ청소년은 성행위 및 그 상대방을 선택하는 사회규범과 성행위의 상호반응에 대해 충분히 알지 못하기 때문에 온전하게 성적 자기결정권을 행사하거나 자신을 방어하기 어렵다는 점은 이미 지적한 바와 같다. 이들은 폭행ㆍ협박이나 위계ㆍ위력이 없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의지를 넘어서는 여러 복합적인 요인이 개입된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성행위에 응하는 경우가 있고, 그 결과 자신을 착취하고 학대하며 해를 끼치는 성행위의 대상이 된다. 이들의 성적 관계맺기와 의사결정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설령 성행위에 동의한 듯이 보이더라도 착취적이고 학대적인 성적 피해를 입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아동ㆍ청소년을 위한 법적 안전망을 강화하여야 한다.
성폭력피해자, 특히 아동ㆍ청소년 피해자는 성폭력피해를 당하였음에도 자신이 비난받을 행동을 했을 것이라는 죄책감과 주변 사람에게 알려질 수도 있다는 걱정 및 자신이 당한 피해가 범죄인지 아닌지 분별하기 어렵고 신고해도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피해신고를 포기하는 일이 많은 것이 현실이다. 강제력 행사의 태양을 구체적으로 특정하지 못하더라도, 그리고 외관상 성행위에 동의하였다는 사정만으로 이들의 성적 피해를 외면해서는 안 된다. 아동ㆍ청소년이 성매매에 나섰다가 오히려 이를 빌미로 협박 등을 당해 또 다른 성착취를 당하는 경우를 차단할 필요도 있다. 위 각 규정에는 이러한 형사정책적인 취지가 반영되어 있다.
이러한 규정은 앞서 판시한 바와 같이, 성폭력범행에 취약한 피해자의 약한 틈을 교묘하게 파고들어 결국 피해자의 자기결정권을 침해하는 행위는 중대한 성폭력범죄에 해당한다는 규범적 판단과 맥을 같이 한다.
결과적으로 위와 같은 입법은 16세 미만자가 성행위에 동의한 외관이 있다 하더라도 이를 쉽게 진정한 성적 자기결정권의 행사로 볼 수 없다는 인식을 전제로 한다. 따라서 16세 미만자의 성행위는 형식적으로 성적 자기결정권 행사를 존중한다는 측면으로 접근하기 보다는 보호되어야 할 성이 침해되었는지 여부의 측면으로 접근하는 것이 타당하다. 이상과 같이 보충의견을 밝힌다.
전용모 로이슈(lawissue) 기자 sisalaw@lawissue.co.kr
<저작권자 © 로이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메일: law@lawissue.co.kr 전화번호: 02-6925-02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