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이슈=법률전문 인터넷신문] 고(故) 김지태씨의 부일장학회(정수장학회 전신) 재산 헌납 강압성 여부를 놓고 유족과 정수장학회, 정치권 등에서 논란이 일고 있는 가운데, 부산고등법원이 최근 군사정부의 강박에 의해 재산을 증여한 것을 인정한 판결을 내려 주목된다.
하지만 부산고법 역시 서울중앙지법 1심 판결과 같이 상속인들인 김지태씨의 유족들이 제척기간이 경과하도록 증여계약을 취소하지 않아 확정적으로 유효한 것으로 됐다며 소멸시효를 문제 삼아 유족에 패소 판결을 내렸다. 이에 유족들은 상고했다.
한편,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후보의 역사인식 논란이 됐던 5ㆍ16에 대해서도 법원은 이 사건을 다루는 판결문에서 ‘군사쿠데타’로 명시했다.
대법원 홈페이지에 올라 온 이 사건 판결 설명 화면 캡처
부산고법에 따르면 기업인 김지태씨는 1949년 7월 부산일보를 인수 경영하고, 1961년 2월 한국문화방송(현 MBC)을 설립하는 등 언론인으로서도 활동했다.
김씨는 1958년 11월 장학사업을 위해 부일장학회를 설립했는데, 그 무렵 부일장학회의 기본재산을 조성하기 위해 부산 일대의 군부대 부지 252필지 10만147평을 사들였다.
그런데 당시 부일장학회가 아직 법인으로 설립되지 않아 매입한 각 토지에 관한 소유권이전등기를 마칠 수 없게 되자, 부산일보 및 부일장학회 임원 명의 신탁약정을 체결하고, 그들 앞으로 소유권이전등기를 마쳤다.
그런데 5ㆍ16 군사쿠데타 직후에 설립된 이른바 군사혁명정부는 부정부패를 일소하고 사회분위기를 쇄신한다는 명분하에 부정축재처리요강을 발표하고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자 등 15명의 기업인들에 대해 부정축재 혐의로 수사를 개시했다.
이에 따라 중앙정보부 부산지부는 1962년 3월 부일장학회 임원 등을 구속하고, 4월에는 김지태씨의 처를 관세법위반 혐의로 구속하는 한편 일본에서 귀국하는 김씨를 부정축재처리법위반, 외환관리법위반 등 여러 건의 범죄사실로 체포ㆍ구금했다.
중앙정보부 부산지부장은 김씨의 회사 임직원들을 연행한 직후 군 야전복을 입고 권총을 차고 찾아와서 “우리 군이 목숨 걸고 혁명을 했는데, 대한민국 모든 국민의 재산은 우리의 것이다”라고 겁을 줬고, 부산지부 수사과장은 김씨의 측근에게 “살고 싶으면 재산을 국가에 헌납하라”고 요구했다.
군 검찰은 중앙정보부 부산지부로부터 사건을 송치 받아 1962년 5월 경남지구 고등군법회의에 김지태씨에 대해 관세법위반, 국내재산도피방지법위반 등의 범죄사실로 공소를 제기했고, 김씨는 군법회의로부터 징역 7년형을 선고받았다. 기소된 지 2주 만이다.
김지태씨는 그 다음날 부산구치소를 방문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법률고문인 신OO이 요구하는 이 사건 각 토지를 포함한 토지 10만147평 및 부산일보, 한국문화방송, 부산문화방송(이하 언론3사) 주식을 국가에 헌납한다는 내용의 ‘포기각서’에 날인했고, 중앙정보부는 위 포기각서를 넘겨받아 국방부로 위 증여 토지에 관련된 서류 일체를 이송했다.
김씨는 1962년 6월20일 부산계엄사령부 법무관실에서 고OO 법무부장관이 제시하는 증여 토지들의 소유권이전등기에 필요한 서류인 ‘기부증서’와 언론3사 주식의 명의개서에 필요한 서류인 ‘기부승낙서’에 날인했다.
그러자 군 검찰은 이틀 뒤 김지태씨가 죄과를 뉘우치고 국가재건에 이바지할 뜻을 표명했다는 이유를 내세워 김씨 등 구속자 전원에 대해 공소를 취소했고, 김씨는 그날 고등군법회의의 공소기각 결정으로 석방됐다.
김지태씨는 1982년 4월 숨졌다. 이후 김대중 대통령의 ‘국민의 정부’는 2004년 11월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국정원 발전위원회)를 구성해 이른바 군사혁명정부 하에서 중앙정보부 등 국가기관을 동원해 김지태씨의 부일장학회 등을 강압적으로 헌납 받았다는 의혹 사건에 관해 진상 규명을 위한 조사를 실시했다.
국정원 발전위원회는 2005년 7월 “박정희 정권이 중앙정보부에 지시해 김지태를 구속한 뒤 처벌을 면해 주는 조건으로 언론3사의 주식과 부일장학회 기본 재산인 토지 10만147평을 헌납 받았을 뿐만 아니라, 특히 중앙정보부가 헌납된 재산 중 토지의 처리 과정에 주도적으로 개입했으며, 김지태가 헌납한 재산이 당연히 공적으로 운영ㆍ관리돼야 함에도 불구하고 5ㆍ16 장학회를 거쳐 정수장학회로 이어져 오면서 사유재산처럼 관리돼 왔다”는 사실을 규명했다.
이에 김지태씨 등 관련자들의 피해를 구제하고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사유재산처럼 운영됐던 정수장학회를 쇄신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을 표명했다.
김씨의 유족들은 그 후 2006년 1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과거사 정리위원회)에 이 사건 각 토지 및 주식기부가 국가권력에 의해 강제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진실규명을 신청했다.
과거사 정리위원회는 2007년 6월 “국가재건최고회의 및 중앙정보부 관계자가 군법회의에서 회사 임원들과 함께 구속재판을 받고 있어 궁박한 처지에 놓인 김지태에게 각 토지 및 김지태 소유의 언론기관 주식을 국가에 헌납할 것을 요구해 재산을 헌납 받은 것은 공권력에 의해 강요된 것으로서 의사결정권 및 재산권을 침해한 것”이라고 판단했다.
이에 “국가공권력의 강요에 의해 재산을 국가에 헌납한 것임이 밝혀진 이상 국가는 그 재산을 원상회복함이 원칙”이라며 “국가는 헌납 토지의 경우 부일장학회에 반환하고, 반환이 어려운 경우 그 손해를 배상함이 마땅하다”고 권고했다.
또 “헌납 주식에 대하여는 정수장학회로부터 국가에게 원상회복이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국가는 망인의 유가족들에게 그 손해를 배상함이 상당하다”며 “국가는 법령에 의거 정수장학회가 특정 집단이나 개인에 의해 운영되고, 보유 언론사 주식을 재단의 경비조달 수단으로 활용해 온 상황을 시정하는 등 적절한 조치를 취함이 상당하다”고 밝혔다.
이에 김지태씨의 유족들은 “5ㆍ16 군사쿠데타 이후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인 박정희는 1962년 2월 중앙정보부 부산지부장에게 망인에 대한 구속수사를 지시함에 따라 한 달간 불법 구금하고, 각 토지를 포함한 막대한 재산을 국가에게 헌납하면 즉시 공소를 취소해 석방하겠지만, 불응하는 경우 망인은 물론 처와 회사 임직원들에게도 중형을 선고하겠다고 협박했다”며 “당시 망인은 회사 임직원들과 함께 구속재판을 받고 있었던 데다가 고등군법회의에서 징역 7년의 중형을 선고받은 궁박한 처지에 있었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판결 선고 다음날 토지 전부에 대한 소유권을 포기한다는 각서를 작성하고, 대한민국에게 토지를 증여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유족들은 “따라서 망인의 증여 의사표시는 대한민국의 강박에 의해 의사 형성 및 표현의 자유가 완전히 박탈된 의사무능력 상태에서 이루어진 것으로서 당연 무효이고, 나아가 국가기관이 불법 구금된 망인에게 엄중한 형벌 혹은 면제를 채찍과 당근으로 삼아 협박하는 등 불법적인 조건을 내세워 각 토지의 증여를 강요한 것이므로, 망인의 증여는 법률행위에 반사회질서적인 조건 혹은 대가가 결부된 경우로서 민법 제103조의 반사회적 법률행위에 해당한다”며 반환을 요구했다.
이에 대해 대한민국은 “국가의 공권력에 의해 행해진 망인의 구속이 다소 공포감을 주었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협박은 강박의 수단에 불과하므로, 증여의 의사표시가 민법 제103조에 의해 무효로 되는 것은 아니고, 이 사건 증여의 의사표시가 망인의 구속취소라는 반대급부로 인정되기 위해서는 구속취소와 증여의 의사표시 사이에 대가성이 있어야 하는데, 증여의 의사표시는 망인의 실정법 위반으로 인한 처벌을 면하기 위한 구명활동에 불과할 뿐 양자 사이에 대가성을 인정할 수 없다”고 반박했다.
또 “비록 망인의 증여가 하자 있는 의사표시로서 취소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망인이 정수장학회 이사장을 만나서 이 사건 각 토지의 소유권 포기문제를 상의한 날인 1962년 9월경 그 취소의 원인이 종료했으므로, 망인의 취소권은 그로부터 3년이 경과한 1965년 9월 그 제척기간이 도과해 이미 소멸했다”며 주장했다.
이에 대해 부산고법 제5민사부(재판장 윤인태 부장판사)는 김지태씨의 유족들이 “강제로 정수장학회에 넘어간 땅을 돌려 달라”며 국가와 부산일보를 상대로 낸 ‘진정명의회복을 위한 소유권 이전등기’ 등 청구소송에서 지난 9월4일 원고 패소 판결(2011나9075)한 것으로 뒤늦게 확인됐다.
재판부는 “이른바 군사혁명정부 하의 다소 억압적인 사회분위기 속에서 중앙정보부가 김지태와 처 그리고 회사 임직원을 구속수사를 하면서 이 사건 각 토지를 증여하지 않으면 김지태나 가족 등의 신체와 재산에 어떤 해악을 가할 것처럼 위협하는 위법행위를 했다”고 밝혔다.
또 “김지태는 군사혁명정부의 억압적인 사회분위기 속에서 중앙정보부의 구속수사를 받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형사재판에서 중형을 선고받았기 때문에 심리적으로 상당히 위축돼 있었을 것으로 보이고, 각 토지와 언론 3사 주식의 증여에 관한 근거자료인 포기각서와 기부승낙서 등 관계서류의 내용이 타인에 의해 미리 작성된 사정을 엿볼 수 있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그러나 “이러한 사정만으로는 각 토지에 대한 망인의 증여 의사표시가 그에게 가해진 강박으로 인해 의사결정을 스스로 할 수 있는 여지를 완전히 박탈당한 상태에서 이루어졌다고 보기 어렵고, 달리 이를 인정할 만한 증거가 없다”며 원고들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또 “망인의 증여 의사표시의 성립과정에 국가공무원인 중앙정보부, 군검찰 등의 불법적인 강박행위가 개재돼 있었다 하더라도, 또 국가기관이 헌법상 보장된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위헌적인 공권력을 행사한 결과 국민이 그 공권력의 행사에 외포돼 자유롭지 못한 의사표시를 했다고 하더라도 그 강박에 의한 의사표시가 항상 반사회성을 띠게 돼 당연히 무효로 된다고는 볼 수 없다”고 설명했다.
아울러 재판부는 “망인과 피고 대한민국 사이의 각 토지에 관한 증여계약은 망인이나 그 상속인인 원고들이 민법 제146조 소정의 제척기간이 경과하도록 이를 취소하지 않아 확정적으로 유효한 것으로 됐고, 피고 대한민국 명의의 각 토지에 관한 소유권이전등기는 실체관계에 부합하는 등기로서 유효하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부산고법 역시 서울중앙지법 1심 판결과 같이 상속인들인 김지태씨의 유족들이 제척기간이 경과하도록 증여계약을 취소하지 않아 확정적으로 유효한 것으로 됐다며 소멸시효를 문제 삼아 유족에 패소 판결을 내렸다. 이에 유족들은 상고했다.
한편,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후보의 역사인식 논란이 됐던 5ㆍ16에 대해서도 법원은 이 사건을 다루는 판결문에서 ‘군사쿠데타’로 명시했다.
대법원 홈페이지에 올라 온 이 사건 판결 설명 화면 캡처
부산고법에 따르면 기업인 김지태씨는 1949년 7월 부산일보를 인수 경영하고, 1961년 2월 한국문화방송(현 MBC)을 설립하는 등 언론인으로서도 활동했다.
김씨는 1958년 11월 장학사업을 위해 부일장학회를 설립했는데, 그 무렵 부일장학회의 기본재산을 조성하기 위해 부산 일대의 군부대 부지 252필지 10만147평을 사들였다.
그런데 당시 부일장학회가 아직 법인으로 설립되지 않아 매입한 각 토지에 관한 소유권이전등기를 마칠 수 없게 되자, 부산일보 및 부일장학회 임원 명의 신탁약정을 체결하고, 그들 앞으로 소유권이전등기를 마쳤다.
그런데 5ㆍ16 군사쿠데타 직후에 설립된 이른바 군사혁명정부는 부정부패를 일소하고 사회분위기를 쇄신한다는 명분하에 부정축재처리요강을 발표하고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자 등 15명의 기업인들에 대해 부정축재 혐의로 수사를 개시했다.
이에 따라 중앙정보부 부산지부는 1962년 3월 부일장학회 임원 등을 구속하고, 4월에는 김지태씨의 처를 관세법위반 혐의로 구속하는 한편 일본에서 귀국하는 김씨를 부정축재처리법위반, 외환관리법위반 등 여러 건의 범죄사실로 체포ㆍ구금했다.
중앙정보부 부산지부장은 김씨의 회사 임직원들을 연행한 직후 군 야전복을 입고 권총을 차고 찾아와서 “우리 군이 목숨 걸고 혁명을 했는데, 대한민국 모든 국민의 재산은 우리의 것이다”라고 겁을 줬고, 부산지부 수사과장은 김씨의 측근에게 “살고 싶으면 재산을 국가에 헌납하라”고 요구했다.
군 검찰은 중앙정보부 부산지부로부터 사건을 송치 받아 1962년 5월 경남지구 고등군법회의에 김지태씨에 대해 관세법위반, 국내재산도피방지법위반 등의 범죄사실로 공소를 제기했고, 김씨는 군법회의로부터 징역 7년형을 선고받았다. 기소된 지 2주 만이다.
김지태씨는 그 다음날 부산구치소를 방문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법률고문인 신OO이 요구하는 이 사건 각 토지를 포함한 토지 10만147평 및 부산일보, 한국문화방송, 부산문화방송(이하 언론3사) 주식을 국가에 헌납한다는 내용의 ‘포기각서’에 날인했고, 중앙정보부는 위 포기각서를 넘겨받아 국방부로 위 증여 토지에 관련된 서류 일체를 이송했다.
김씨는 1962년 6월20일 부산계엄사령부 법무관실에서 고OO 법무부장관이 제시하는 증여 토지들의 소유권이전등기에 필요한 서류인 ‘기부증서’와 언론3사 주식의 명의개서에 필요한 서류인 ‘기부승낙서’에 날인했다.
그러자 군 검찰은 이틀 뒤 김지태씨가 죄과를 뉘우치고 국가재건에 이바지할 뜻을 표명했다는 이유를 내세워 김씨 등 구속자 전원에 대해 공소를 취소했고, 김씨는 그날 고등군법회의의 공소기각 결정으로 석방됐다.
김지태씨는 1982년 4월 숨졌다. 이후 김대중 대통령의 ‘국민의 정부’는 2004년 11월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국정원 발전위원회)를 구성해 이른바 군사혁명정부 하에서 중앙정보부 등 국가기관을 동원해 김지태씨의 부일장학회 등을 강압적으로 헌납 받았다는 의혹 사건에 관해 진상 규명을 위한 조사를 실시했다.
국정원 발전위원회는 2005년 7월 “박정희 정권이 중앙정보부에 지시해 김지태를 구속한 뒤 처벌을 면해 주는 조건으로 언론3사의 주식과 부일장학회 기본 재산인 토지 10만147평을 헌납 받았을 뿐만 아니라, 특히 중앙정보부가 헌납된 재산 중 토지의 처리 과정에 주도적으로 개입했으며, 김지태가 헌납한 재산이 당연히 공적으로 운영ㆍ관리돼야 함에도 불구하고 5ㆍ16 장학회를 거쳐 정수장학회로 이어져 오면서 사유재산처럼 관리돼 왔다”는 사실을 규명했다.
이에 김지태씨 등 관련자들의 피해를 구제하고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사유재산처럼 운영됐던 정수장학회를 쇄신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을 표명했다.
김씨의 유족들은 그 후 2006년 1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과거사 정리위원회)에 이 사건 각 토지 및 주식기부가 국가권력에 의해 강제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진실규명을 신청했다.
과거사 정리위원회는 2007년 6월 “국가재건최고회의 및 중앙정보부 관계자가 군법회의에서 회사 임원들과 함께 구속재판을 받고 있어 궁박한 처지에 놓인 김지태에게 각 토지 및 김지태 소유의 언론기관 주식을 국가에 헌납할 것을 요구해 재산을 헌납 받은 것은 공권력에 의해 강요된 것으로서 의사결정권 및 재산권을 침해한 것”이라고 판단했다.
이에 “국가공권력의 강요에 의해 재산을 국가에 헌납한 것임이 밝혀진 이상 국가는 그 재산을 원상회복함이 원칙”이라며 “국가는 헌납 토지의 경우 부일장학회에 반환하고, 반환이 어려운 경우 그 손해를 배상함이 마땅하다”고 권고했다.
또 “헌납 주식에 대하여는 정수장학회로부터 국가에게 원상회복이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국가는 망인의 유가족들에게 그 손해를 배상함이 상당하다”며 “국가는 법령에 의거 정수장학회가 특정 집단이나 개인에 의해 운영되고, 보유 언론사 주식을 재단의 경비조달 수단으로 활용해 온 상황을 시정하는 등 적절한 조치를 취함이 상당하다”고 밝혔다.
이에 김지태씨의 유족들은 “5ㆍ16 군사쿠데타 이후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인 박정희는 1962년 2월 중앙정보부 부산지부장에게 망인에 대한 구속수사를 지시함에 따라 한 달간 불법 구금하고, 각 토지를 포함한 막대한 재산을 국가에게 헌납하면 즉시 공소를 취소해 석방하겠지만, 불응하는 경우 망인은 물론 처와 회사 임직원들에게도 중형을 선고하겠다고 협박했다”며 “당시 망인은 회사 임직원들과 함께 구속재판을 받고 있었던 데다가 고등군법회의에서 징역 7년의 중형을 선고받은 궁박한 처지에 있었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판결 선고 다음날 토지 전부에 대한 소유권을 포기한다는 각서를 작성하고, 대한민국에게 토지를 증여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유족들은 “따라서 망인의 증여 의사표시는 대한민국의 강박에 의해 의사 형성 및 표현의 자유가 완전히 박탈된 의사무능력 상태에서 이루어진 것으로서 당연 무효이고, 나아가 국가기관이 불법 구금된 망인에게 엄중한 형벌 혹은 면제를 채찍과 당근으로 삼아 협박하는 등 불법적인 조건을 내세워 각 토지의 증여를 강요한 것이므로, 망인의 증여는 법률행위에 반사회질서적인 조건 혹은 대가가 결부된 경우로서 민법 제103조의 반사회적 법률행위에 해당한다”며 반환을 요구했다.
이에 대해 대한민국은 “국가의 공권력에 의해 행해진 망인의 구속이 다소 공포감을 주었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협박은 강박의 수단에 불과하므로, 증여의 의사표시가 민법 제103조에 의해 무효로 되는 것은 아니고, 이 사건 증여의 의사표시가 망인의 구속취소라는 반대급부로 인정되기 위해서는 구속취소와 증여의 의사표시 사이에 대가성이 있어야 하는데, 증여의 의사표시는 망인의 실정법 위반으로 인한 처벌을 면하기 위한 구명활동에 불과할 뿐 양자 사이에 대가성을 인정할 수 없다”고 반박했다.
또 “비록 망인의 증여가 하자 있는 의사표시로서 취소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망인이 정수장학회 이사장을 만나서 이 사건 각 토지의 소유권 포기문제를 상의한 날인 1962년 9월경 그 취소의 원인이 종료했으므로, 망인의 취소권은 그로부터 3년이 경과한 1965년 9월 그 제척기간이 도과해 이미 소멸했다”며 주장했다.
이에 대해 부산고법 제5민사부(재판장 윤인태 부장판사)는 김지태씨의 유족들이 “강제로 정수장학회에 넘어간 땅을 돌려 달라”며 국가와 부산일보를 상대로 낸 ‘진정명의회복을 위한 소유권 이전등기’ 등 청구소송에서 지난 9월4일 원고 패소 판결(2011나9075)한 것으로 뒤늦게 확인됐다.
재판부는 “이른바 군사혁명정부 하의 다소 억압적인 사회분위기 속에서 중앙정보부가 김지태와 처 그리고 회사 임직원을 구속수사를 하면서 이 사건 각 토지를 증여하지 않으면 김지태나 가족 등의 신체와 재산에 어떤 해악을 가할 것처럼 위협하는 위법행위를 했다”고 밝혔다.
또 “김지태는 군사혁명정부의 억압적인 사회분위기 속에서 중앙정보부의 구속수사를 받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형사재판에서 중형을 선고받았기 때문에 심리적으로 상당히 위축돼 있었을 것으로 보이고, 각 토지와 언론 3사 주식의 증여에 관한 근거자료인 포기각서와 기부승낙서 등 관계서류의 내용이 타인에 의해 미리 작성된 사정을 엿볼 수 있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그러나 “이러한 사정만으로는 각 토지에 대한 망인의 증여 의사표시가 그에게 가해진 강박으로 인해 의사결정을 스스로 할 수 있는 여지를 완전히 박탈당한 상태에서 이루어졌다고 보기 어렵고, 달리 이를 인정할 만한 증거가 없다”며 원고들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또 “망인의 증여 의사표시의 성립과정에 국가공무원인 중앙정보부, 군검찰 등의 불법적인 강박행위가 개재돼 있었다 하더라도, 또 국가기관이 헌법상 보장된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위헌적인 공권력을 행사한 결과 국민이 그 공권력의 행사에 외포돼 자유롭지 못한 의사표시를 했다고 하더라도 그 강박에 의한 의사표시가 항상 반사회성을 띠게 돼 당연히 무효로 된다고는 볼 수 없다”고 설명했다.
아울러 재판부는 “망인과 피고 대한민국 사이의 각 토지에 관한 증여계약은 망인이나 그 상속인인 원고들이 민법 제146조 소정의 제척기간이 경과하도록 이를 취소하지 않아 확정적으로 유효한 것으로 됐고, 피고 대한민국 명의의 각 토지에 관한 소유권이전등기는 실체관계에 부합하는 등기로서 유효하다”고 판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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