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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대경] 서울고법이 가이드라인 제시한 ‘존엄사’

판결문 통해 생명존중과 존엄사에 대한 재판부의 고민 고찰

2009-02-14 09:54:40

1심 법원에 이어 의학적으로 생명연장이 불가능한 환자에게 인간답게 죽을 권리를 인정해야 한다는 항소심 판결이 나왔다.

서울종합법원청사(왼쪽이 서울고법) 서울고법 제9민사부(재판장 이인복 부장판사)는 지난 10일 식물인간 상태인 환자 김OO(76,여)씨와 가족들이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중단해 달라”며 서울 신촌 세브란스병원을 상대로 낸 소송에서 1심과 같이 김씨 가족의 손을 들어줬다.

그동안 연명치료 중단(존엄사)과 관련된 명확한 기준이 없어 의사들은 환자가 숨질 때까지 방어 진료를 하는 등 혼란을 겪어 왔다. 그런데 이번에 항소심이 연명치료를 중단할 수 있는 4가지의 구체적인 사례를 제시해 이번 판결이 대법원에서 확정되면 연명치료 중단의 가이드라인이 될 가능성이 높다.

이번 사건의 사회적 중요성을 인식해 재판부가 이례적으로 ‘당부의 말씀’을 통해 “이번 판결이 경사진 비탈을 굴러가듯 확대 해석돼 환자와 가족에 대한 치료 중단 강요와 압박으로 작용해선 안 된다”고 밝힌 것처럼, 판결에 나타난 재판부의 고민을 상세하게 보도한다.

◆ 사건 경위 = 환자 김씨는 지난해 2월 세브란스병원에서 폐암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폐 조직검사를 받던 중 폐 혈관이 터져 과다 출혈에 따른 뇌손상으로 식물인간 상태에 빠졌다.

담당 주치의는 자발호흡은 없지만 뇌사상태는 아니며 지속적 식물인간상태로서 의식을 회복할 가능성은 매우 낮다고 판단했다. 다른 대학 의사도 반응이 없는 상태로서 지속적 식물인간상태라고 진단했다.

실제로 김씨는 만 76세의 고령으로 의식을 상실한 후 11개월이 경과했으나 상태가 개선되는 징후는 보이지 않고 있을 뿐 아니라, 특히 자발호흡이 없어 인공호흡기에 의해 생명이 유지되는 상태다.

한편, 김씨는 3년 전 남편의 임종 당시 며칠 더 생명을 연장할 수 있는 기관절개술을 거부하고 자식들에게 그대로 임종을 맞게 하면서 “내가 병원에서 안 좋은 일이 생겨 소생하기 힘들 때 호흡기는 끼우지 말라. 기계에 의해 연명하는 것은 바라지 않는다”고 말한 부분은 가족들이 연명치료 중단을 요청한 중요한 근거가 됐다.

이에 김씨의 가족들은 지난해 5월 어머니의 연명치료를 중단해 달라며 소송을 냈고, 1심인 서울서부지법 제12민사부(재판장 김천수 부장판사)는 지난해 11월28일 국내 사법사상 최초로 “인공호흡기를 제거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다음은 항소심의 판단 주요 내용이다.

◆ 인간 생명의 보호 = 재판부는 먼저 “인간 생명이 어떠한 경우에도 존중되고 보호돼야 하는 것은 치료나 회생의 가능성이 희박한 경우에도 마찬가지”라며 “비록 현재의 의료수준으로 치료나 회생의 가능성이 없는 것으로 판단되는 경우라도 생명이 유지되는 한 향후 의학이나 의료기술의 발달에 따라 치료가 가능할 수도 있고, 또 다른 기적이 일어날 가능성은 언제나 열려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따라서 “환자의 치료를 맡고 있는 의사는 당해 환자의 생명을 보호 및 유지하기 위한 최선의 조치를 다할 의무가 있다”고 강조했다.

◆ 자기결정권에 의한 연명치료 중단 가능성 = 재판부는 그러나 “의사에게 환자의 생명을 보호 및 유지하기 위한 최선의 조치를 다할 의무가 있다고 해서, 항상 가능한 모든 의술이나 의약을 사용해 봐야 한다거나 꺼져가는 인간 생명을 어떤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연장시켜야 한다고 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이어 “환자에게 의학적으로 무용한 처치를 계속 받도록 하거나 의사에게 그런 치료를 계속 강제하는 경우, 환자의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이 훼손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재판부는 “생명의 회생가능성도 없는 상태에서 단지 기계장치 등에 의해 연명되고 있는 경우라면 헌법이 보장하는 자기결정권에 근거해 구체적인 사정에 따라 더 이상 연명치료의 중단을 요구할 수 있고, 그 경우 연명치료를 행하는 의사는 환자의 자기결정권에 근거한 치료중단 요구에 응할 의무가 있다고 봐야 한다”며 “기계에 대한 의존상태를 벗어나 자연스러운 죽음에 이르는 편이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회복하는 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 입법의 필요성 = 재판부는 “생명유지기술이 고도로 발달해 있고, 그런 기술이 나날이 발전하고 있는 현대의 의료현실에서 생명이 기계장치에 의해 연명되는 사례는 이후로도 많이 발생할 것으로 보인다”고 우려했다.

연명치료에 대한 법적인 근거가 마련되지 않으면 반대로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중단한다는 명목으로 실제로는 회생가능성이 있는 환자에 대해 고의 또는 섣부른 판단으로 치료를 중단해 사망을 초래하는 일이 발생할 가능성 역시 우려된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위와 같은 상황에서 연명치료 중단 등의 문제를 아무런 기준 제시 없이 의사나 환자 본인, 가족들의 판단에만 맡겨두는 상황이 지속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고, 또한 개개의 사례들을 모두 소송사건화해 일일이 법원의 판단을 받게 하는 것도 비현실적이다”며 “따라서 연명치료 중단 등에 관한 일정한 기준과 치료중단에 이르기까지의 절차, 방식, 남용에 대한 처벌과 대책 등을 규정한 입법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 자기결정권에 기한 연명치료 중단 = 재판부는 “회생가능성이 없는 환자가 이미 사망의 과정에 진입함으로써 사망이 임박해 있다고 판단되는 경우라면 비록 별다른 입법조치 등이 없더라도 환자의 자기결정권에 기해 연명치료를 중단하는 것이 가능해야 한다”며 “언제 죽느냐 못지않게 어떻게 죽느냐도 인간의 존엄성과 관련해 결코 경시할 수 없는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아울러 “자기결정권에 기한 연명치료 중단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죽음을 억제하지 않는 것일 뿐 생명을 인위적으로 단축시키는 것이 아니므로, 형사법적으로 살인이나 자살관여행위의 구성요건에도 해당하지 않는다고 봐야 한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재판부는 “생명유지장치의 제거를 통해 연명치료를 중단하기 위해서는 이에 관한 기준이나 절차를 규정한 별도의 입법이 없는 현재의 경우 다음과 같은 요건들이 갖추어져야 한다”며 4가지 기준을 제시했다.

◆ 첫째, 회생가능성 없는 사망과정의 진입을 꼽았다. = 재판부는 “아무리 환자 스스로의 결정에 의한 것이더라도 치료중단을 빌미로 생명을 임의로 단축하는 것은 허용될 수 없다”고 전제한 뒤 “연명치료 중단이 가능하려면 무엇보다 환자의 구체적인 상태를 전제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의학적 기준에 의해 환자의 회생가능성이 없는 것으로 판단되는 경우여야 한다”고 제시했다.

환자가 회생가능성이 없는 사망과정에 진입한 상태인지를 판단할 주체와 관련, 재판부는 “연명치료를 시행하면서 환자를 진료 및 관찰해 온 담당의사의 의견이 존중돼야 함은 당연하고, 병원윤리위원회와 같은 기구의 심의 등으로 이를 보완할 필요도 있다”고 말했다.

이어 “환자의 연명치료 상태가 담당의료진의 의료과실에 의해 초래돼 환자 또는 가족과 담당의사 사이의 신뢰가 깨진 경우도 있을 수 있는 점에 비춰, 담당의사의 견해만으로 이를 판단할 수 있다고 해서는 곤란하고, 제3의 중립적인 의료기관에 의한 판단 역시 어떤 형태로든 필요하다”며 신중하게 판단할 것을 주문했다.

◆ 둘째로, 환자의 진지하고 합리적인 치료중단 의사를 꼽았다. = 재판부는 먼저 “환자가 의식을 상실해 환자의 직접적이고 명시적인 의사를 바로 확인할 수 없는 상황에서 환자의 주관적 의사의 확인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은 자칫 불가능한 요건을 요구하는 것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을 밝혔다.

이어 “이런 점에서 향후 입법 과정에서는 사전의료지시서와 같은 방법 뿐 아니라 일정한 범위 내에서는 가족들의 의사, 환자에 대한 최선의 이익이라는 관점 등을 통해 이를 인정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나아가 “의식을 상실한 환자의 경우 연명치료 중단의 청구 자체가 실제로는 환자가 아닌 가족 등에 의해 이루어질 것인데, 이런 경우 환자를 대리하는 자의 지정에 관한 절차를 마련해 둘 필요가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연명치료 중단에 관한 가족들의 견해나 이해관계가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으므로, 그런 상황도 상정해 둘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재판부는 “이런 입법이 이루어지지 않은 현 상황에서는 환자의 평소 언행과 생활태도, 인생관 및 종교관 등을 통해 환자가 현재의 상태에 관한 정보를 충분히 제공받았다면 표시했을 진정한 의사를 구체적으로 추정할 수 있어야 한다고 볼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다만 “환자의 의사는 합리적이어야 하고, 연명치료에 관한 환자의 자기결정권 행사는 사회적 타당성이 있어야 한다”며 순전히 경제적인 부담 때문이라거나 또는 자살의도에 기인하는 경우 등일 경우에는 허용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재판부는 “만약 회생가능성의 정도가 매우 낮거나 장기간에 걸친 연명치료를 해온 경우라면 환자의 의사를 다소 완화해 추정할 수 있을 것”이라며 “환자가 겪는 통증, 환자의 나이, 나아가 가족이 겪는 고통 등의 사정들도 환자의 의사를 추정하는데 있어 함께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 셋째, 중단을 구하는 치료행위의 내용 = 재판부는 먼저 “중단하는 치료행위에 환자의 고통을 완화하기 위한 치료나 일상적인 진료 등이 포함되어서는 안 된다”며 “이런 치료는 환자가 인간으로서 존엄과 품위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필수적인 처치로서 사망에 이를 때까지 계속돼야 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어 “중단을 구할 수 있는 치료는 환자 상태의 개선이 아니라 환자의 연명 즉 사망과정의 연장으로서 현 상태의 유지에 관한 것이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재판부는 치료행위에 드는 비용의 문제도 함께 고려해야 한다는 점도 밝혔다. 재판부는 “치료행위에 드는 비용이 과다한 경우라면 이런 점은 환자 본인과 가족의 경제적인 부담 뿐 아니라 의료자원의 균형적 배분이라는 사회적 관점에서도 중단 여부를 결정하는 데에 참작사유가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 넷째, 의사에 의한 치료중단의 시행 = 재판부는 “연명치료의 중단이 의사에 의해 시행돼야 하는 이유는, 연명치료 뿐 아니라 중단행위도 의료행위로서, 의료행위는 의료인이 아니면 이를 행할 수 없는 것이고, 특히 연명치료의 중단은 그 의미의 중대성을 고려할 때 그 중에서도 전문성과 자격을 갖춘 의사에 의해 직접 시행될 필요가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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