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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컷" 이후에도 보호받아야 할 성적 자기결정권을 위해

2026-01-28 10:55:49

한국영화성평등센터(마음의 숲 연구소) 박주연 소장
한국영화성평등센터(마음의 숲 연구소) 박주연 소장
[로이슈 진가영 기자] 영화 현장은 고도의 집중력과 감정 에너지가 분출되는 공간이다. 하지만 '예술적 자유, 성취'라는 화려한 수식어 뒤에는, 창작이라는 명분 아래 개인의 심리적 경계가 무너져도 침묵해야 했던 구조적 트라우마가 존재해 왔다. 현장은 '예술의 공간'이기 이전에 엄연한 '노동의 현장'이다. 하지만 화려한 스포트라이트 뒤에서, 사용자가 근로자에게 마땅히 제공해야 할 '안전배려의무'는 자주 망각되곤 한다.

"예술을 위한 희생"은 가스라이팅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감독의 절대적 권위 아래 배우가 자신의 신체적·감정적 거부권을 상실할 때, 그것은 예술적 몰입이 아니라 「예술인의 지위와 권리의 보장에 관한 법률」이 금지하는 인격권 침해로 귀결된다. 대법원은 이미 성희롱 사건 심리에서 '성인지 감수성'을 잃지 말아야 한다고 판시하며, 위계 관계에서 피해자가 처한 '얼어붙음(Freeze)' 상태가 결코 법적인 동의가 아님을 명확히 했다. "작품을 망칠 수 없다"는 책임감은 착취의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된다.

평판이 생계와 직결되는 좁은 업계 특성상 내부 고발은 어렵다. 진정한 예술적 허용은 오직 구성원 간의 심리적 안전감이 확보된 상태에서만 가능하며, 그 핵심은 상호 존중과 명확한 동의에 있다. 이를 위해 최근 할리우드와 국내 일부 현장에서 도입 중인 '인티머시 코디네이터(Intimacy Coordinator)'의 의무화가 시급하다. 무술 감독이 액션 신의 합을 짜듯, 노출과 애정 신에서도 전문가가 개입하여 배우의 신체적 한계와 동의 범위를 사전에 명문화하고, 돌발적인 연출 요구로부터 배우를 보호하는 시스템이 정착되어야 한다.

또한, 공신력 있는 제3의 외부 상담 기구를 활성화하고, 가해자에 대한 엄격한 페널티와 실질적인 피해자 보호 매뉴얼이 현장에서 작동해야 한다. 상담현장에서 만나는 피해자들의 목소리는 여전히 무겁고 막막하기만 하다.

“예방 교육요? 받았죠. 하지만 막상 그 상황이 제일이 되니까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어요. 그저 제가 너무 예민하게 반응하는 건 아닌지, 혹시 내가 잘못 느낀 건 아닐지 스스로를 확인해 보게 되더라고요“라며 상담실 문을 두드린 한 피해자의 고백은 우리가 마주한 서글픈 단명을 보여준다. 피해자가 가해자의 위계 아래 놓인 예술 현장에서 권리를 주장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누가 내말을 믿어줄까’라는 근본적인 두려움과 ‘내가 잘못할 것은 아닐까’라는 자책은 피해자를 침묵이라는 감옥에 스스로 가두게 만든다.

피해자가 어렵게 용기를 내어 주변에 입을 뗐을 때, 그 결과는 극면하게 갈린다. 단 한사람이라도 ‘그때 네 잘못이 아니야. 내가 믿어줄께’라고 응답해 준다면, 그 신뢰를 디딤돌 삼아 상담과 법적 구제 절차로 나아갈 동력을 얻을 수 있지만, 지극히 이례적인 ‘요행’으로 치부될 만큼 드물다는 점이다.

촬영 전 성희롱·성폭력 예방교육 실시 의무가 「예술인의 지위와 권리의 보장에 관한 법률」 제17조와 해당 법의 시행령 제8조에 규정되어 있지만, 서류 채우기, 지식 전달이 아닌 ‘감수성 훈련’이 되어야 한다. 동료들이 이를 감지하고, 방관하지 않는 '적극적 관찰자'로 제지할 수 있는 수평적 소통 문화가 필수적으로 조성되어야 한다.

영화는 인간의 삶과 존엄을 다루는 예술이다. 타인의 영혼에 상처를 입히며 만들어진 예술은 결코 관객의 마음에 닿을 수 없다. "레디, 액션"과 "컷" 사이의 열정만큼이나, 촬영이 끝난 후 일상으로 돌아가는 동료들의 마음 건강 또한 소중히 다뤄져야 한다.

도움말 : 한국영화성평등센터(마음의 숲 연구소) 박주연 소장

진가영 로이슈(lawissue) 기자 news@lawissu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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