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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년 만에 누명 벗은 할아버지…국가에 26억 위자료 판결

서울중앙지법 “수사기관이 공권력 동원해 고문 등으로 자백 받으며 발생한 특수한 불법행위로, 민주주의 법치국가에서는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되는 것”

2013-07-18 14:33:28

[로이슈=법률전문 인터넷신문] 강간치사 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15년을 복역하다 모범수로 가석방됐던 70대 할아버지가 재심을 통해 무려 39년 만에 무죄를 선고받은데 이어, 그 할아버지 가족이 국가로부터 26억원을 배상받게 됐다.

사건은 1972년 9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춘천경찰서 역전파출소장의 딸(9)이 춘천시 우두동 소재 논둑길에서 사체로 발견됐는데, 부검결과 피해자는 강간당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 사건이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불러일으키자, 내무부장관은 1972년 10월 10일까지 범인을 검거하도록 지시하고 그 시한까지 범인을 검거하지 못할 경우 관계자들을 문책하겠다는 시한부 검거령을 내렸다.

춘천경찰서 소속 경찰관들은 30여명의 용의자들을 소환해 수사를 벌이는 과정에서 춘천시 우두동에서 만화 가게를 운영하던 정원섭(79)씨가 평소 여자관계가 불량하다는 등의 정보가 입수되자 연행해 조사했다.

하지만 별다른 혐의점을 찾지 못한 경찰은 이후 정씨를 다시 연행해 자신이 범인이라는 자백을 받아냈다. 당시 공소사실을 보면 정씨는 만화가게 단골로서 자신을 곧잘 따르던 피해자를 사건 현장으로 데려가 강간한 뒤 목 졸라 살해했다는 것이었다.

정씨는 검찰에서 첫 번째 자백한 이후의 수사과정 및 공판과정에서 “범행을 자백한 것은 경찰에서 받은 고문 등 가혹행위 때문이었다”고 주장하며 범행을 부인했다.

하지만 정씨는 강간치사죄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15년간 복역을 하다 1987년에 모범수로 가석방됐다.

◈ ‘진실ㆍ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 문 두드려 재심

출소한 정씨는 무죄를 호소하며 법원에 재심을 청구했지만 기각됐고, 이후 2007년 ‘진실ㆍ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의 문을 두드렸다.

과거사정리위원회는 “당시 수사경찰관들은 정씨가 범인으로 의심되자 적법절차에 반하는 무리한 수단을 동원해 관련 참고인 진술 등을 확보했고, 이를 토대로 정씨에게 자백을 받아내는 과정에 폭행과 협박 내지 가혹행위를 동원했을 가능성이 높다”며 자백은 증거능력이 없다고 판단했다.

그러면서 정씨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하고 15년간 복역하는 결과를 가져왔으므로, 정씨의 피해 및 명예를 회복할 수 있도록 재심 등 후속 조치를 권고했다.

이에 정씨는 재심을 청구했고 법원은 이례적으로 일반 형사사건에 대해 재심 개시를 결정해 다시 원점에서 시작됐다.

1심인 춘천지법 제2형사부(재판장 정성태 부장판사)는 2008년 11월 강간치사, 살인 혐의로 기소된 정원섭씨에게 “검사가 제출한 증거들은 피고인이 범인이라는 확신을 주기에는 부족하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신의 눈을 갖지 못한 재판부로서는 감히 이 사건의 진실에 도달했다고 자신할 수는 없다”며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대한민국 헌법과 법률이 규정하고 있는 적법절차원칙에 따르면 검사가 제출한 증거들은 증거로 사용될 수 없거나 믿을 수 없는 것이어서, 그것들만으로는 피고인의 유죄를 인정할 수 없다”고 밝혔다.

이어 “이 사건 수사 과정에서 자신이 마땅히 누려야 할 최소한의 권리와 적법절차를 보장받지 못한 채 고통을 겪었던 피고인이 마지막 희망으로 기대었던 법원마저 적법절차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고민이 부족했고 그 결과 피고인의 호소를 충분히 경청할 수 없었다는 점에 대해서는 어떠한 변명의 여지도 없다”고 덧붙였다.

이에 검사가 항소했으나 서울고법 제11형사부(재판장 이기택 부장판사)도 2009년 2월 정원섭씨에 대해 “무엇보다 피해자가 사망한 시각에 피고인이 집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고, 참고인들의 진술도 경찰의 강압 또는 회유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이는 점 등을 종합하면, 공소사실을 인정하기에 부족하다”며 1심 무죄 판단을 유지했다.

사건은 검사의 상고로 대법원으로 올라갔으나, 대법원 제1부(주심 안대희 대법관)도 2011년 10월 파출소장의 초등생 딸을 성폭행한 뒤 목 졸라 살해한 혐의(살인)로 기소돼 15년간 복역한 정원섭씨에 대한 재심사건에서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재판부는 “피고인은 경찰 조사단계에서 고문 등 가혹행위로 인해 임의성 없는 자백을 하고, 그 후 검사의 조사단계에서도 임의성 없는 심리상태가 계속돼 동일한 내용의 자백을 한 것으로 봐야 한다”며 “따라서 공소사실을 자백하는 내용의 검사 작성의 피의자신문조서는 증거능력이 없다”고 밝혔다.

또 “공소사실에 부합하는 주된 증거인 참고인들의 진술이 번복돼 신빙성이 없는 것으로 봐야 하고, 나머지 관련자들의 진술 또는 증언도 직접적인 증거가 될 만한 내용도 아니다”며 “공소사실에 대해 범죄의 증명이 없다고 판단해 무죄를 선고한 원심은 정당하다”고 판시했다.

◈ 서울중앙지법, 정원섭 할아버지와 가족들이 겪은 고통 위로

이에 정원섭씨와 그 가족들이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2012가합540547)을 냈고, 서울중앙지법 제33민사부(재판장 박평균 부장판사)는 지난 16일 “국가는 정원섭씨에게 7억3900만원, 배우자에게 6억원 등 원고 가족들에게 총 26억3000만원의 위자료를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재판부는 먼저 “수사기관이 강압적인 수사로 참고인들과 정씨에게 허위 진술을 유도해 정씨가 허위자백을 하게 돼 유죄 판결을 받았다”며 “수사과정에서 나타난 공무원들의 행위는 국민을 보호할 의무를 지니는 국가가 오히려 가해자가 돼 범죄혐의자에 대한 수사라는 직무집행의 외관을 갖추어 저지른 위헌적인 불법행위에 해당하므로, 피고 국가는 정씨와 가족들에게 손해를 배상할 책임이 있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이 사건은 공무원들이 통상적인 공무수행 과정에서 개별적으로 저지르게 된 일반적인 불법행위가 아니고, 국민의 기본적 인권을 보호해 국민 개개인의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보장할 임무가 있음에도 오히려 공권력을 악용해 고문을 받지 아니하며 형사상 자기에게 불리한 진술을 강요당하지 아니할 권리 등 원고의 보편적 자유와 기본적 인권을 조직적으로 침해하는 행위를 함으로써 발생한 특수한 불법행위로서, 이는 민주주의 법치국가에서는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또 “원고는 평온한 일상을 살다가 갑자기 연행돼 고문과 가혹행위를 당하면서 극도의 신체적 고통에 시달렸고, 정신적으로도 극한의 두려움과 절망에 빠졌으며, 수형생활 중 및 석방된 후에도 파렴치범이라는 이유로 경찰에 연행된 때로부터 무죄 판결이 확정될 때까지 40년 가까이 사회적 냉대, 신분상의 불이익, 경제적 궁핍을 당했을 뿐 아니라, 가족들마저도 본인이 뒤집어 쓴 그릇된 낙인으로 인해 똑같은 고통을 당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감당하기 어려운 신체적・정신적 고통과 멍에를 짊어져야 했다”고 위로했다.

재판부는 “원고의 가족들도 원고가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갑자기 연행된 후 재판을 거쳐 유죄 확정판결을 받는 과정을 충격과 공포로 지켜보았고, 특히 원고의 아버지는 원고가 구금된 지 채 1년도 못 돼 충격으로 사망했고, 나머지 가족들도 흉악범의 가족이라는 주위 사람들의 차가운 시선 속에 살던 동네를 떠나 뿔뿔이 흩어져야만 했으며, 그 후로도 자신과 가족들에 대해 계속되는 사회적 냉대와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 감내하기 힘든 고통과 불안을 겪어야 했다”며 거액의 위자료 판결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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