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이슈 신종철 기자] 한국전쟁 중 군법회의에서 북한을 이롭게 하는 이적죄로 사형 선고를 받고 총살을 당한 고 최능진 선생이 재심을 거쳐 대법원에서 최종 무죄를 확정 받았다. 사형 집행된 지 65년 만이다.
법원에 따르면 최능진씨는 1898년 평남에서 출생해 중국, 미국 등지에서 수학하면서 도산 안창호 선생이 이끄는 흥사단에 가입해 활동했다. 1928년 귀국해 평양에서 후학 육성을 위해 노력하다가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에 연루돼 옥고를 치렀다.
최씨는 해방 이후에는 평남 건국준비위원회에서 치안부장으로 활동했으나 소련군의 진주와 우익에 대한 탄압 등으로 인해 1945년 9월 월남하게 됐다. 이후 미 군정청의 경찰전문학교 교장, 경무부 수사국장으로 재직하면서 경찰 내부의 친일파 숙청을 요구했다.
1947년 서재필 박사의 대통령 추대운동을 벌이다가 실패한 뒤에는 백범 김구, 김규식 선생과 함께 한민당의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기도 했다.
검찰은 공무원이던 최씨가 1950년 7월 애국자인 민간인 다수에게 ‘대한민국에 충성을 다한 것을 과오로 생각하고 이를 반성해 그 정신을 금후 일소하고 인민군에게 적극 협력할 것을 맹서한다’는 취지의 자수서를 서울시 인민위원회에 제출하도록 함으로써 적의 우익진영 인물포섭정책에 적극 협력한 혐의로 기소했다.
또 대한민국 국회의원 10여 명에게 ‘인민 10만을 대변하는 국회의원은 모름지기 10만 인민을 위하여 실력을 지배하고 있는 괴뢰군에게 부합하여야 한다’고 선동함으로써 국회의원이 적에게 부역할 것을 촉진한 혐의도 받았다.
검찰은 최씨가 대한민국 정부를 부인하는 북한과 이에 아부하는 이른바 중간 애국지사파를 망라한 연립정부 수립을 제안ㆍ호소할 것을 기도함으로써 국제연합군의 실력행사를 무의미하게 해 대한민국 국권을 전복하고자 했다는 등의 혐의로 기소했다.
결국 국방경비법 제32조 이적 혐의로 기소된 최씨는 육군본부 군법회의에서 단심으로 사형을 선고받고 1951년 2월 총살을 당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2009년 8월 “피고인(최능진)이 사실관계가 오인된 판결로 사형을 선고받아 총살당함으로써 중대한 인권인 생명권을 침해받았으므로, 재심청구가 있는 경우 사법부는 재심 수용 등 적절한 조치를 취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취지의 진실규명결정을 했다.
법원은 재심을 받아들였다. 이후 진행된 1심인 서울중앙지방법원 제28형사부(재판장 최창영 부장판사)는 2015년 8월 국방경비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최능진 선생에 대한 재심 사건에서 이적죄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한편 재판부는 재심 무죄 판결을 내리면서 고인과 유족을 위로했다.
재판부는 “우리 사법체계가 미처 정착ㆍ성숙되지 못했던 혼란기, 6․25라는 시대적 상황 속에서 군사법원에 의한 그릇된 공권력 행사로 말미암아 허망하게 생명을 빼앗긴 고(故)인에 대해 재판부로서 참으로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재판부는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뒤늦게나마 고인의 무죄를 공적으로 선언하는 이 재심판결이 이미 유명을 달리 한 고인의 인격적 불명예를 복원하고 불행한 과거사를 바로잡는 데 도움이 되기를 희망한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아울러 평생 마음의 상처로 고통 받으며 인고의 세월을 살아왔을 재심청구인을 비롯한 유가족들에게도 명예를 회복하고 자긍심을 되찾는 위안의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위로했다.
이에 검사가 항소했으나, 서울고법 제1형사부(재판장 이승련 부장판사)는 지난 3월 검사의 항소를 기각하며 최능진 선생에 대한 1심 무죄 판결을 유지했다.
사건은 검사의 상고로 대법원으로 올라갔으나, 대법원 제2부(주심 이상훈 대법관)는 6월 28일 최능진 선생에 대한 국방경비법 위반 재심 상고사건에서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재판부는 “재심대상사건의 기록이 이미 폐기돼 존재하지 않는 이 사건에서 현존하는 최량의 증거인 재심대상사건의 판결문과 진실ㆍ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의 조사결과 등에 대한 종합적인 검토결과를 토대로 공소사실에 대해 범죄사실의 증명이 없는 때에 해당한다고 봐 피고인에게 무죄를 선고한 제1심판결을 그대로 유지한 원심의 조치는 정당한 것으로 수긍이 간다”고 밝혔다.
신종철 기자 sky@lawissue.co.kr
법원에 따르면 최능진씨는 1898년 평남에서 출생해 중국, 미국 등지에서 수학하면서 도산 안창호 선생이 이끄는 흥사단에 가입해 활동했다. 1928년 귀국해 평양에서 후학 육성을 위해 노력하다가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에 연루돼 옥고를 치렀다.
최씨는 해방 이후에는 평남 건국준비위원회에서 치안부장으로 활동했으나 소련군의 진주와 우익에 대한 탄압 등으로 인해 1945년 9월 월남하게 됐다. 이후 미 군정청의 경찰전문학교 교장, 경무부 수사국장으로 재직하면서 경찰 내부의 친일파 숙청을 요구했다.
1947년 서재필 박사의 대통령 추대운동을 벌이다가 실패한 뒤에는 백범 김구, 김규식 선생과 함께 한민당의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기도 했다.
검찰은 공무원이던 최씨가 1950년 7월 애국자인 민간인 다수에게 ‘대한민국에 충성을 다한 것을 과오로 생각하고 이를 반성해 그 정신을 금후 일소하고 인민군에게 적극 협력할 것을 맹서한다’는 취지의 자수서를 서울시 인민위원회에 제출하도록 함으로써 적의 우익진영 인물포섭정책에 적극 협력한 혐의로 기소했다.
또 대한민국 국회의원 10여 명에게 ‘인민 10만을 대변하는 국회의원은 모름지기 10만 인민을 위하여 실력을 지배하고 있는 괴뢰군에게 부합하여야 한다’고 선동함으로써 국회의원이 적에게 부역할 것을 촉진한 혐의도 받았다.
검찰은 최씨가 대한민국 정부를 부인하는 북한과 이에 아부하는 이른바 중간 애국지사파를 망라한 연립정부 수립을 제안ㆍ호소할 것을 기도함으로써 국제연합군의 실력행사를 무의미하게 해 대한민국 국권을 전복하고자 했다는 등의 혐의로 기소했다.
결국 국방경비법 제32조 이적 혐의로 기소된 최씨는 육군본부 군법회의에서 단심으로 사형을 선고받고 1951년 2월 총살을 당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2009년 8월 “피고인(최능진)이 사실관계가 오인된 판결로 사형을 선고받아 총살당함으로써 중대한 인권인 생명권을 침해받았으므로, 재심청구가 있는 경우 사법부는 재심 수용 등 적절한 조치를 취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취지의 진실규명결정을 했다.
법원은 재심을 받아들였다. 이후 진행된 1심인 서울중앙지방법원 제28형사부(재판장 최창영 부장판사)는 2015년 8월 국방경비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최능진 선생에 대한 재심 사건에서 이적죄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한편 재판부는 재심 무죄 판결을 내리면서 고인과 유족을 위로했다.
재판부는 “우리 사법체계가 미처 정착ㆍ성숙되지 못했던 혼란기, 6․25라는 시대적 상황 속에서 군사법원에 의한 그릇된 공권력 행사로 말미암아 허망하게 생명을 빼앗긴 고(故)인에 대해 재판부로서 참으로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재판부는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뒤늦게나마 고인의 무죄를 공적으로 선언하는 이 재심판결이 이미 유명을 달리 한 고인의 인격적 불명예를 복원하고 불행한 과거사를 바로잡는 데 도움이 되기를 희망한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아울러 평생 마음의 상처로 고통 받으며 인고의 세월을 살아왔을 재심청구인을 비롯한 유가족들에게도 명예를 회복하고 자긍심을 되찾는 위안의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위로했다.
이에 검사가 항소했으나, 서울고법 제1형사부(재판장 이승련 부장판사)는 지난 3월 검사의 항소를 기각하며 최능진 선생에 대한 1심 무죄 판결을 유지했다.
사건은 검사의 상고로 대법원으로 올라갔으나, 대법원 제2부(주심 이상훈 대법관)는 6월 28일 최능진 선생에 대한 국방경비법 위반 재심 상고사건에서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재판부는 “재심대상사건의 기록이 이미 폐기돼 존재하지 않는 이 사건에서 현존하는 최량의 증거인 재심대상사건의 판결문과 진실ㆍ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의 조사결과 등에 대한 종합적인 검토결과를 토대로 공소사실에 대해 범죄사실의 증명이 없는 때에 해당한다고 봐 피고인에게 무죄를 선고한 제1심판결을 그대로 유지한 원심의 조치는 정당한 것으로 수긍이 간다”고 밝혔다.
신종철 기자 sky@lawissu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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