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이슈=신종철 기자] 한국에서 국가 공무원들의 불법행위로 일본인이 큰 고난을 겪었다면 국가가 손해를 배상해야 한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이는 일본인에 대한 국가배상청구권을 인정한 대법원의 첫 판결이다.
법원에 따르면 허OO씨는 1943년 일본에서 태어나 오사카대학을 다니다, 1973년 서울대 의대에 입학해 의예과 2년을 수료하고 본과 1년을 다니다 유학 중이었다.
그런데 허씨는 1975년 10월 서울대 부속병원 기숙사에서 중앙정보부 수사관들에게 의해 영장 없이 불법연행 구금돼 조사를 받았다. 수사관들은 구타, 협박 등 가혹행위를 가하며 허위자백을 유도했다.
중앙정보부는 허씨가 한국에서 수집한 국가기밀을 누설해 간첩행위를 했다면서 국가보안법상 간첩 및 반공법상 잠입 등의 혐의로 검찰에 넘겼다. 이후 서울지검은 1975년 12월 국가보안법상 회합 통신, 간첩 및 반공법상 잠입 등의 혐의로 기소했다.
서울형사지방법원은 1976년 4월 공소사실을 모두 유죄로 인정해 허OO씨에게 징역 3년6월과 자격정지 3년6월을 선고했고, 항소심은 1심 판결을 유지했다.
하지만 대법원은 1976년 12월 허씨가 국가기밀 누설 탐지 등 범행을 했다는 점에 대해 자백 외에 증거가 없다며 원심판결을 파기했고, 서울고등법원은 1977년 2월 허씨를 보석으로 석방하고 1979년 1월 무죄를 선고했다.
대한민국 국민으로 살던 허씨는 2006년 일본으로 귀화했다. 이후 진실ㆍ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2010년 7월 “국가는 중앙정보부가 허씨를 장기간 불법구금하고, 가혹행위를 가한 점 등에 대해 사과하고, 화해를 위한 적절한 조치를 취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결정을 내렸다.
허씨는 “중앙정보부(중정)에서 조사받을 당시 가족의 면회가 되지 않았고, 변호인의 접견권을 고지 받지 못 했으며 변호인 접견도 허용되지 않았다”며 “뿐만 아니라 수사관들 세 사람이 교대로 몽둥이로 연거푸 구타해 가면서 자백을 요구했다”고 진술했다. 구타의 지독한 고통을 당했다고 주장했다.
뒤늦게 위원회의 결정에 허씨가 대한민국 정부를 상대로 1억원의 소송을 냈다.
하지만 정부는 “허씨가 2006년 일본으로 귀화해 외국인이고, 외국인에 대한 국가배상은 해당 국가와 상호 보증이 있을 때에만 적용되는 것으로, 일본과 우리나라는 국가배상에 관한 상호보증이 없어 원고의 소는 부적법하다”는 취지로 항변했다.
하지만 1심인 서울중앙지법 민사25단독 이원중 판사는 2012년 8월 허OO씨가 대한민국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2011가단442991)에서 “원고에게도 국가배상법이 적용된다”면서 “피고는 원고에게 3000만원을 지급하라”며 원고 승소 판결했다.
재판부는 “피고(대한민국)의 불법행위는 원고가 대한민국 국민이었을 때 발생했고, 원고가 대한민국 국적을 상실했다고 하여 원고의 피고에 대한 국가배상청구권이 상실된다고는 볼 수 없다”고 말했다.
또 “국가배상법의 상호주의는 조약이나 협정으로 양국 간에 타방 국민인 피해자에게 국가배상청구권을 인정한다는 점을 명문의 규정으로 체결할 것을 요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재판부는 “피고 소속 공무원인 중정 수사관들은 원고를 헌법 및 형사소송법이 규정하는 적법절차를 지키지 않은 채 강제 연행해 구속영장 없이 불법 구금했고, 가족의 면회나 변호인의 접견권도 보장되지 않았으며, 구타와 협박 등 가혹행위를 해 원고에게 허위자백을 하도록 했다”며 “피고는 국가배상법에 따라 일련의 불법행위로 인해 원고가 입은 정신적 고통을 금전으로 배상할 의무가 있다”고 밝혔다.
위자료 액수와 관련, “불법행위의 내용과 정도, 피해 당시의 나이, 가족관계, 경제적 곤란 등 피해 후의 상황, 특히 무엇보다도 국민들의 인권을 보호하는 것을 기본적인 책무로 삼아야 할 국가권력에 의해 조직적으로 불법 구금 및 고문이 자행됐다는 점 등을 참작해보면, 피고가 지급해야 할 위자료의 액수는 3000만원으로 정한다”고 설명했다.
항소심인 서울중앙지법 제7민사부(재판장 이효두 부장판사)는 2013년 6월 대한민국이 일본인 허OO씨에게 지급해야 할 위자료 액수를 1심보다 7000만원을 늘려 1억원을 인정했다.
재판부는 “이 사건은 국민의 인권을 보호하는 것을 기본적인 책무로 삼아야 할 국가권력에 의해 조직적으로 불법구금과 가혹행위가 이루어진 것으로 반인권적, 조직적인 특수성과 불법의 중대함, 오사카대학교 및 대학원을 수료한 후 서울대 의예과를 수료하는 등 전도가 유망했던 원고가 어느 날 갑자기 영장 없이 강제로 연행돼 1년 반가량 구금되고 3년여 동안 간첩혐의를 받아, 석방 이후에도 그로 인한 정신적ㆍ신체적 후유증과 고통, 간첩혐의로 재판을 받은 사람에 대한 사회적 시선, 경제적 곤란 등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었다”고 밝혔다.
또 “원고는 항소심까지 간첩죄 등에 대한 유죄판결을 받았다가 불행 중 다행으로 대법원에서 판결이 파기돼 최종적으로는 무죄판결이 확정됐으나 국가기관에 의해 거짓으로 자백할 정도까지 불법구금과 가혹행위를 당했던 점이나 당시의 시대적 상황 등에 비춰 국가를 상대로 형사보상을 청구하리라는 것은 기대하기 어려운 것으로 보인다”고 봤다.
재판부는 “국가의 불법행위 시와 변론종결 시 사이에 장기간의 세월이 흘러 통화가치 등에 상당한 변동이 생김으로써 위자료배상 채무의 지연손해금을 위자료 산정의 기준시인 변론종결일로부터 붙이는 점, 비슷한 유형의 사건에서 인정된 위자료 금액과의 형평성, 원고의 가족관계 등 모든 사정을 종합해 보면, 원고에 대한 위자료를 1억원으로 정함이 상당하다”고 판단했다.
이 사건은 국가의 상고로 대법원으로 올라갔으나, 대법원 제2부(주심 이상훈 대법관)는 일본인 허OO씨가 대한민국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 상고심(2013다208388)에서 국가배상책임을 인정한 원심을 확정했다.
허씨가 일본인으로서 대한민국 소속 공무원의 위법한 직무집행으로 인한 피해에 대해 국가배상법의 적용을 받으려면 일본에서 우리나라 국가배상법 제7조가 정하는 상호보증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일본 국가배상법 제1조 제1항은 ‘국가 또는 공공단체의 공권력을 행사하는 공무원이 그 직무를 행함에 있어서 고의 또는 과실로 위법하게 타인에게 손해를 가한 때에는 국가와 공공단체는 이를 배상할 책임이 있다’고 규정하고, 제6조는 ‘이 법률은 외국인이 피해자인 경우에는 상호보증이 있을 때에만 이를 적용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재판부는 “일본의 국가배상청구권의 발생요건 및 상호보증에 관해 우리나라 국가배상법과 동일한 내용을 규정하고 있으므로, 일본에서의 국가배상청구권의 발생요건이 현저히 균형을 상실하지 않고, 우리나라 국가배상법이 정한 그것보다 전체로서 과중하지 않아 중요한 점에서 실질적으로 거의가 차이가 없다”고 봤다.
재판부는 “또한 일본의 국가배상법 규정에 비추어 보면 우리나라 국민이 일본에서 국가배상청구를 할 경우 그 청구가 인정될 것이 기대될 뿐만 아니라, 실제로 일본에서 다수의 재판 예를 통해 우리나라 국민에 대한 국가배상청구가 인정되고 있으므로, 우리나라와 일본 사이에 국가배상법 제7조가 정하는 상호보증이 있는 것으로 봄이 타당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따라서 원심판단은 정당하고, 거기에 상고이유의 주장과 같은 국가배상법상 상호보증에 관한 법리오해의 위법이 없다”며 국가의 상고를 기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