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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전재수 국회의원 "따뜻한 이웃이 되겠습니다"

동국대 사범대학서 역사교사준비하다 정치인으로

2018-12-02 18:02:44

전재수 국회의원이 12월 1일 오후 8시40분 부산지역사무실에서 인터뷰에 응하고 있다.
전재수 국회의원이 12월 1일 오후 8시40분 부산지역사무실에서 인터뷰에 응하고 있다.
[로이슈 전용모 기자] 1971년 경남의령출생, 만덕초등학교(8회), 덕천중학교(3회), 구덕고등학교(3회), 동국대학교 역사학과 졸업, 해병대 병장(병 701기), 전 경제부총리 정책보좌관, 전 청와대 제2부속실장, 전 국회예산결산특별위원회, 전 국회민생경제특별위원회.

“따뜻한 이웃이 되겠습니다.”라고 적힌 전재수(부산 북구·강서구갑/더불어민주당 부산시당위원장) 국회의원 명함 뒷면에 새겨진 이력이다.
◇도시락 보다 축구공이 더 좋아… 공부 안 한다고 끌려간 곳이 주산학원
◇주산5단·암산1단 실력 갖춰, 한·중·일 계수왕 선발대회서 승산 부분 2등

사범대학에서 교사의 꿈을 꿨던 그가 정치인으로 변신한 이유와 그의 삶을 들여다봤다.

전재수 국회의원의 학창시절로 거슬러 올라가보자.

그는 스포츠를 아주 좋아하는 평범한 학생이었다. 도시락은 안 싸들고 다녀도 축구공은 끼고 다닐 정도로 구기종류에 남다른 애착을 가졌다. 이를 지켜본 어머니는 공부는 안하는 이런 아들을 붙들어 매놔야겠다는 생각에 그를 고 2때까지 주산학원에 강제로 보냈다. 이 덕분에 주산 5단, 암산 1단의 실력을 갖추게 됐다.

서울 무학여교에서 열린 한-중-일 계수왕 선발대회에 부산대표로 나가서 승산(곱하기)부분에서 2등상을 받기도 했다. 한 곳에 몰입하면 푹 빠지는 성격 탓이다. 운동 때문에 체력이 좋아졌다. 이때의 체력으로 지금까지 버티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국회의원 300명 중에 주산5단은 저 말고 아마도 없을 겁니다.”(웃음).

그는 아니다 싶은 것에 대해서는 유달리 먼저 나서는 기질이 있었다. 불합리하거나 잘못된 것을 보면 못 참는 성격이다. 선생님 같은 모습과는 달리 해병대출신이다.

◇전교조 해직 고교은사 보며 역사 선생님 되고파 동국대 사범대 진학 … 참교육자상 원천봉쇄 경찰과 맞서 투쟁

그는 고교은사의 영향으로 역사교사를 꿈꾸던 학생이었다. 그런 그를 정치로 하도록 한 계기가 있었다.

고 3때인 1989년. 전교조 해직교사였던 존경하던 은사가 복직투쟁을 하는 모습을 보면서 어린 마음에 세상은 평화롭지도 낭만적이지도 않다고 생각을 하게 됐고, 내가 선생님이 돼서 역사를 제대로 가르쳐야 선생님 같은 일이 없어지겠다는 생각으로 동국대 사범대 역사학과를 선택했다.

1991년도 그가 대학 2년 때였다. 동국대 중강당에서 제1회 참교육자상 시상식이 있었는데 그때 수상자가 존경해왔던 고교은사 신용길(국어) 선생님이었다. 전교조 해직교사였고 복직투쟁을 하면서 암으로 투병하다 돌아가셨다. 수상은 사모님이 대신 수상하러왔다.

그런데 서울경찰청에서 행사를 원천봉쇄하기 위해 경찰력을 투입했다. 여기에 맞서 그는 전투조로 투쟁했다. “선생님의 가르침을 생각하며 화염병에 불을 붙여 던지는데 선생님 얼굴이 또렷하게 기억나더군요. 지금도 가슴에 또렷이 남아있습니다.”

이 사건이 계기돼 그의 마음은 달라져가고 있었다. 그래서 교사임용시험도 안 봤다. “한평생 학교 울타리 안에 있을 자신도 없었고 한 명의 교사가 사회를 과연 얼마나 바꿀 수 있겠느냐는 한계도 느꼈기 때문입니다.”

◇정치를 통해 세상을 변화시키고자 교사포기 하고 대학원 정치학과로 진학
◇2000년 노무현 전 대통령 부산 북강서을 국회의원 출마 자원봉사로 인연


그래서 대학원은 정치학과로 갔다.

정치의 힘에 대해 긍정적이었던 그는 정치가 많은 것을 할 수 있는 힘이 있고 정치의 역할을 긍정적으로 보고 정치를 통해 세상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마음이 컸다고 했다.

지금도 늘 은사님의 삶을 비쳐볼 때 내가 얼마나 정의로운지 얼마나 초심을 잃지 않고 정치를 시작할 당시의 마음을 잘 간직하고 있는지 성찰의 기준이 되고 있다고 그리움을 대신했다.

1999년 말 대학원을 졸업하고 바로 국회로 갔는데 거기서 노무현 전 대통령(종로 국회의원)을 만났다. 2000년 노 전 대통령이 16대 부산 북강서을 국회의원에 출마를 준비하던 시기였다.

같이 부산에 내려왔다. 그렇게 노무현 국회의원후보 자원봉사자로서 인연을 맺었다. 낙선을 한 노 전 대통령의 소개로 박인상 국회의원(부산출신 한국노총위원장) 보좌관으로 생활하기도 했다. 2년 보좌관 생활이후 청와대로 들어갔다.

그는 지난 10년 동안 세 번(북구청장,국회의원 2번) 선거에 떨어지고 4번째 2016년 20대 총선에서 당선됐다. 더불어민주당 원내부대표(2017년 5월 ~ 2018년 5월)를 하기도 했다. 제20대 국회 후반기 정무위원회 위원, 제20대 국회 전반기 윤리특별위원회 위원, 2015년 3월 전재수의 시대성찰이야기를 펴냈다. ‘사람 사는 세상’ 노무현 재단 자문위원을 맡고 있다.

전재수 의원 국감서 질의를 하고 있다.
전재수 의원 국감서 질의를 하고 있다.

◇실패 통해 사람대하는 것과 겸손 배워…국감서 삼성생명 암 환자 보험금 문제 다뤄

‘실패를 통해서 내가 잘나서 되는 게 없구나. 주위에서 마음써줘 되는 것이다’는 것을 알게 됐고 ‘실패를 통해 사람대하는 것을 배우고 여기서 겸손을 배웠다’는 그다. 이렇다보니 주위 사람들은 그를 두고 ‘낙선했을 때나 당선됐을 때나 한결같다’고 귀띔한다.

그는 정치를 하고 싶었던 이유이자 정치를 하기를 잘 했다는 사례를 들려줬다.

이번 국정감사에서의 일이었다.

암 보험료를 꼬박꼬박 냈던 사람이 정작 암에 걸리니까 생명보험회사가 안 줄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 보험금을 지급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암 진단을 받는 순간 최고의 약자가 그들이다. 가장 나약한 처지로 전락하는 암보험 가입자를 상대로 생명보험회사들은 보유한 자문위나 변호사를 통해 온갖 안 줄 수 있는 방법을 동원한다고 했다.

그래서 이번 국감에서 암보험 사례를 조사하고 증인채택도 하고 금융감독원과 금융감독위원회와 삼성생명을 대상으로 했다.

지난 1년 동안 금감원 앞에서 매일 집회해도 면담한 번 안 해주던 것을 면담 다 시키고 금융감독원의 자세를 전향적으로 바꾸었다. 그러자 암환자 50여명이 사무실에 왔고 그중에 한 어르신은 고맙다고 저를 껴안고 우시기도 한 모습을 보면서 “이것이야 말로 정치를 하고 싶었던 이유이자 제가 정치를 하기를 잘했다고 드는 생각입니다.”

평소 7일에 4번 정도 비행기를 타는데 이번 주에는 지역구와 서울로 비행기를 8번 탔다. 손발이 통통 붓기도 했다고. 국회의원으로서 부산시당 위원장으로서의 바쁜 일상을 대변해 주고 있다.

전재수 국회의원은 더불어민주당 부산시당 위원장으로서의 각오도 내비쳤다.

전국단위로는 처음으로 12월 8일 오후 1시부터 5시30분까지 부산 동구청 대강당에서 선출직공직자 대회를 연다. 시장, 구청장, 구의원, 시의원, 국회의원 150명이 참석한다.

새롭게 기강과 기풍을 정립하고 모범사례를 확산해 이것을 정례화, 내실화 시켜나가겠다는 게 그의 의지다. 30년 만에 더불어민주당을 선택해준 시민들의 성원에 보답하고 특히 당적이 없는 시민들의 쓴 소리를 가감 없이 듣는 시간도 마련된다. 혹시나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게 회초리를 맞겠다는 것이다.

◇지역구를 속옷 챙겨 출장 오는 모습 보여주기 싫어 가족이 부산 지역구서 생활

대개 지역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되면 서울서 생활을 하는 게 다반사다. 되레 지역구에 올 때는 속옷을 챙겨 출장 오듯이 하는데 저는 이런 모습 보여주지 않겠다는 얘기다.

그래서 전재수 의원은 가족이 모두 부산 지역구에서 이웃들과 부대끼며 거주하고 있다.

가족이야기를 들어봤다. 그의 부인(최혜진)은 동국대 역사학과(93학번) 후배다. 선후배로 그렇게 지냈다. 전 의원은 정치학과로 부인은 영문과로 대학원으로 진학했다. 그러다 대학원 졸업할 때쯤 눈이 맞아 2001년 사랑의 결실을 맺었다.

“10년 동안 세 번 선거에 낙선하면 집사람이 우울증이 걸릴 만도 한데 참고 견디는 건 낙천적이고 유쾌하고 긍정적인 성품도 한 몫 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봉사활동에 남다른 열정을 보이는 집사람과 선거운동을 하다보면 ‘집사람한테 잘해라. 집사람보고 찍는다’는 말을 종종 듣습니다.” 여기에는 물질적으로 정신적으로 고생 많이 한 아내에 대한 미안함과 고마움이 묻어있다.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길을 가르쳐주는 교육 돼야”…‘다행복학교 1호’ 만덕고 모범 사례

이들 사이에는 딸이 2명이 있다. 금융전문가가 되고 싶다는 첫째(전서영)는 구남중학교 3학년 전교학생회 부회장이고 둘째(전채영)는 구남초등학교 6학년 학생회장이다. 바쁜 일정으로 아이들과 시간을 많이 못 가지는 게 미안한 마음이라고 전했다. 그래도 가끔씩은 가족들과 영화 관람을 하며 정을 나누고 있다.

아버지로서 아이들에게 늘 “내가 절실해서, 필요해서 공부하는 게 기억에 남는다. 창의적이고 무슨 일을 했을 때 행복감을 느낄 수 있는 일을 찾아야한다. 그것이 스티브잡스 같은 사람도만들 수 있다”며 공부를 강요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막내는 발레, 합기도, 줄넘기를 취미로 하고 있다,

사범대학을 다녔던 전의원의 교육관은 이렇다.

“고려시대부터 지금까지 교육이 출세와 입신양명의 도구였지 어떻게 하면 행복하게 사는지를 알려주는 교육이 아니었다. 그러다보니 극소수의 승리자와 대다수의 패배자를 만들어 낸 게 교육이 해왔던 역할이었다. 그중에서 행복한 사람은 아무도 없는 그런 사회가 되어가고 있다. 그래서 교육이 자신이 하고 싶은 것 하고 어떻게 하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길을 가르쳐 주는 교육이 돼야한다.”는 입장이다.

이렇듯 전의원이 심혈을 기울인 것이 있다. 바로 김석준 부산시교육감과 뜻을 같이해 부산에서 만덕고등학교를 ‘다행복학교’ 1호로 지정한 것인데 4년차로 성과를 내고 있다.

만덕고는 주입식 교육을 탈피해 토론과 대화위주로 교육을 한다. 지역 사찰인 만덕사의 유례(고려시대 때는 왕이 되지 못한 왕자들은 전부 중국으로 유학 보내거나 머리를 깎아버리는데 그중 한 왕자가 스님이 돼 만덕사를 창건)를 소재로 채택해 이를 연극으로 만들어 지역축제 때 무대에 올려 시민들에게 선보임으로써 몰랐던 역사(전설)를 알려준다.
지역의 소재를 학습의 소재로 쓰고 거기서 성취된 결과를 지역에 환원시키는, 지역과 학교가 서로 열려있는(주고받는) 모범적인 사례다. 자타공인 부산의 다행복학교의 모범사례로 꼽고 있다.

처음에는 학부모의 저항이 심했지만 지금은 환영하고 있다. 이렇다 보니 서울대 등 명문대학에 진학하는 수도 늘고 있다고.

전의원은 올해 1월 부산 북구를 ‘다행복 교육지구’로 지정했다. 만덕고 모범사례를 북구 전역으로 확산시키고 있다.

부모님얘기를 하면서 잠시 생각에 잠겨있다.
부모님얘기를 하면서 잠시 생각에 잠겨있다.

◇청소부 부친, 공장 다니는 모친 통해 삶에 대한 애착과 자세 배워

부모님에 대한 이야기도 나왔다. “제가 낙선할 때마다 부모님은 화병이 하나씩 늘어가는 것 같아 뵐 때 마다 마음이 아픕니다.”

현재 그의 부친(77)은 한쪽 눈이 실명됐다. 북구청 환경미화원으로 정년퇴임했다. 그 당시 리어카를 끌고 힘들게 수거하며 일했고 지역은 언덕 비탈길이 대부분이었다. 전의원 역시 학교를 마치고 이일을 도와주어 주위에서 동업자란 말까지 들릴 정도였다.

어머니(71)도 현재 새벽 4시 반에 일어나 오후 7시 반까지 대파 뽑는 일을 하고 있다. 하루일당은 6만원이다(도시락지참 6만5천원). 일을 그만두시라고 말려도 ‘사람은 일안하면 죽는다’는 어머니의 고집은 꺾을 수 없었다. 폭염이나 혹한에도 매일 나가시다 매주 경매가 없는 토요일 에 쉰다.

대학교 3학년 때 우연히 어머니가 일하시는 고무신공장에 가본 적이 있었는데 어머니는 지하에서 10여명이 신발 밑창에 본드를 칠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본드냄새 때문에 눈을 뜰 수 없고 두통이 날정도로 열악한 환경이었다. 그는 3분도 안 돼 그곳을 뛰쳐나왔다고.

딸자식 교육시키려고 희생한 우리의 어머니 모습이었다.

그는 “이런 환경에서 자식을 위해 일하시는 어머님을 보고 너무 가슴이 미여졌다”고 잠시 말을 멈췄다.

그래서 전의원은 누구보다도 이런 부모님을 존경하고 자랑스러워하고 있다. 여기서 자연스럽게 부모님으로부터 삶에 대한 강한 애착과 자세, 그리고 태도를 배웠다.

“제가 힘들거나 나약해 질 때면 어머니가 몸이 얼어들어오면 아버지가 몸을 만져 풀어주는 모습과 어머니 얼굴을 떠올리면서 이 나이에 이러면 안 된다고 마음을 가다듬곤 합니다.”

1남2녀의 장남인 그에게 여동생이 2명 있다. 한 명은 돈을 벌기위해 여상을 졸업하고 성실함으로 중견기업 경리부장자리에 올랐다. 이를 위해 야간대학을 졸업하고 결혼했다.

막내 여동생은 고등학교 2학년 때 김소월 문학상으로 등단했고 숙명여대를 졸업하고 공무원 생활을 하다 결혼하면서 그만뒀다고 한다. 당시 취업전선에 뛰어든 동생한테 고맙다는 오빠의 마음을 전했다.

◇정치권의 영호남 대립은 자치분권에 백해무익


그는 동서화합과 자치분권에 대한 생각도 말했다.

“사실은 영호남의 대립이나 갈등구조는 정치인들이 만들고 정치인들이 수혜를 입는 구조다. 그런 구도를 공고히 하고 확산시키려는 측면이 분명히 있다. 정말로 이것이 국가균형발전이라든지 자치분권강화라든지 또는 우리정치가 한 단계 더 성숙하게 발전하는데 있어 백해무익이다. 많이 나아지고 있지만 영호남교류, 특히 정치권에 있어 영호남 화합 등 이 부분은 중장기과제로 가져가야 되지 않느냐 생각하고 있습니다.”

끝으로 전재수 국회의원은 이렇게 다짐한다.

“정치하는 사람들이 이전에도 정치해왔고 앞으로도 계속할 것처럼 생각하는 오류를 저지르는데 그렇지 않다. 하고 있을 때 이게 마지막이라는 자세로 열과 성을 다하는 자세로 정치를 하겠습니다. 그리고 나밖에, 가족밖에, 친척밖에 모르는 사회를 다함께 우정과 우의를 나눌 수 있는 ‘따뜻한 이웃공동체’를 만드는데 도움이 되는 정치를 하겠습니다. 마지막엔 따뜻한 이웃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습니다.”

전용모 기자 sisalaw@lawissu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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