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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TBC의 스파이크, ‘박근혜 권력’이 무너지다

[촛불 1주년과 미디어 시민⓺] ‘권력 붕괴’에 대한 보수의 몰인지가 촛불을 불러내다

2017-11-21 12:51:49

*촛불혁명 1주년이라 한다. 지난해 10월말 최순실 게이트 정국이 본격적으로 점화된 후 시민들은 거리로 나왔고, 12월의 국회 대통령 탄핵안 가결과 올해 3월의 헌법재판소의 대통령 파면 결정을 이끌어냈다. 1주년을 맞아 이 사건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진행 중이다. 로이슈는 그중에서 ‘미디어 시민’이란 개념으로 지난 이십여 년을 반추한 한윤형 저 <미디어 시민의 탄생>의 후반부를 소개한다. 박근혜 정부 탄생에서 몰락까지를 다룬 3개장을 9회에 걸쳐 연재한다.

21장 SNS·언론 연합군, 박근혜를 쏘다 (3)
이제 여론은 폭발하기 시작했다. 보수와 진보를 뛰어넘는 언론 연합군이 SNS 시민들의 지원과 격려를 받으며 전진하기 시작했다. 미디어 시민과 언론이라는 중간 단체가 협력하여 역사를 바꾼 소중한 사례의 출발이었다. JTBC는 10월 9일 방송에서 정유라의 훈련 일지 특혜 의혹을 보도하기 시작했고, 《조선일보》는 10월 11일부터 다시 우병우 수석을 정조준하기 시작했다. 10월 12일에 정유라의 이화여대 특혜 의혹이 수면에 부상하자 ‘흙수저’들의 분노는 절정에 이르렀다. 정치뉴스에 큰 관심이 없는 중년 여성들이 사건에 분노하고 고교생들이 광장에 몰려나오는 계기로 작용했다. 10월 13일 《경향신문》은 처음으로 ‘최순실 게이트’란 말을 사용했다. 10월 15일엔 박근혜 대통령이 갤럽 정례조사에서 취임 후 최저 지지율인 26%를 기록한 가운데 새누리당이 문재인의 안보관을 공격하기 위한 ‘송민순 회고록’ 공세를 시작했다. 16일에 새누리당은 문재인에 대해 ‘내통’이란 말을 써가면서까지 공격했지만 정국은 바뀌지 않았다. 이후 모든 언론은 최순실과 정유라를 찾아 독일로 떠났다.

TV조선의 ‘리시브’와 《한겨레》의 ‘토스’에 이어 ‘스파이크’를 준비하고 있던 것은 JTBC였다. JTBC에선 전진배 사회 2부장과 손용석 특별취재팀장이 탐사보도에 큰 역할을 했다고 알려져 있다. 10월 19일 JTBC는 “최순실 씨의 핵심 측근 고영태씨의 증언 중에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최순실 씨가 박근혜 대통령의 연설문을 손보는 일까지 했다는 것이었다”라고 보도했다. “회장이 제일 좋아하는 건 연설문 고치는 일”, “연설문을 고쳐놓고 문제가 생기면 애먼 사람을 불러다 혼낸다”라는 고영태의 발언을 보도했다. 이에 이원종 청와대 비서실장은 “봉건시대에도 있을 수 없는 얘기가 어떻게 밖으로 활자화되는지 정말 개탄스럽다”며 보도를 전면 부인했다. 돌이켜 보면 범죄를 저지르면서 유능한 조력자들의 힘을 빌리지 않고 자기편에게도 사실을 철저하게 숨겼다는 것이 박근혜 정부 몰락의 큰 원인이었다.

10월 24일, 박근혜 대통령은 취임 후 네 번째 국회 시정연설에서 ‘개헌’ 카드를 던진다. 시정연설 당시 국회 본회의장에선 몇몇 야당 의원이 “#그런데최순실은?”이라고 쓰인 손 피켓을 들고 항의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훗날 알려진 바에 따르면 당시 청와대는 JTBC가 태블릿PC를 입수한 걸 알고 있었고, 보도를 막기 위해 전방위로 압력을 가하다가 통하지 않자 시정연설에서 개헌을 말하게 되었다고 한다.

(...) 그날 밤, JTBC ‘뉴스룸’이 특종을 냈다. 손용석 JTBC기자는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월요일 오전 대통령이 갑자기 ‘개헌’이라는 엄청난 카드를 제시했다. ‘과연 우리 보도가 개헌을 넘을 수 있을까’라는 고민도 잠시, 보도국 회의를 다녀온 전진배 부장이 말했다. ‘그대로 준비합시다.’”

‘뉴스룸’이 시작되고, 손석희 JTBC 보도담당 사장이 입을 열었다.

“지난주 JTBC는 최순실 씨의 최측근이라고 하는 고영태 씨를 취재한 내용을 단독으로 보도해 드렸습니다. ‘최순실 씨가 유일하게 잘하는 것이 대통령 연설문을 수정하는 것이다’라는 내용이었는데요. 이 내용을 보도하자 청와대 이원종 비서실장은 ‘정상적인 사람이면 믿을 수 있겠나. 봉건시대에도 있을 수 없는 얘기다’라고 말했습니다. JTBC가 고 씨의 말을 보도한 배경에는 사실 또 다른 믿기 어려운 정황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JTBC 취재팀은 최순실 씨의 컴퓨터 파일을 입수해서 분석했습니다. 최 씨가 대통령 연설문을 받아봤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최 씨가 연설문 44개를 파일 형태로 받은 시점은 모두 대통령이 연설을 하기 이전이었습니다.”(정철운,《 박근혜 무너지다》, 메디치, 2016, 238~239쪽)

‘비선실세 국정농단’은 이로써 현실이 됐다. 시민들이 믿지 않을까 두려워 언론사들이 수집하고도 차마 내지 못했던 좀 더 구체적인 국정농단에 관련한 보도들도 쏟아지기 시작했다. JTBC 보도 다음날인 10월 25일 박근혜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대국민 사과를 했다. 그러나 훗날 밝혀졌듯 그조차 거짓 해명이었다. 기자들은 이날 박 대통령의 모습을 보면서 “박근혜가 저렇게 힘빠진 모습을 본 적이 없다. 뭔가 ‘기’가 다 빠져 나가고 보통 사람이 된 것 같다”라고 평했다.

사과 기자회견 다음날인 10월 26일, 종합일간지 1면 머리기사 제목은 ‘최순실 충격’으로 가득했다. 《조선일보》는 <부끄럽다>라는 제목의 통 사설을 실었다. 전날 《조선일보》는 ‘신문으로 배우는 실용한자’란 지면에 ‘下野(하야)’란 단어를 올렸다. 《중앙일보》 페이스북 계정이 이 사실을 소개하여 ‘하야’는 10월 25일 하루종일 포털사이트의 실시간 검색어 1위였다. 그렇게 시민들의 폭발한 분노를 다음날 신문 지면이 적극적으로 받아 안으면서, 박근혜 정부의 권력은 무너졌다.

박근혜 대통령, 청와대, 그리고 새누리당은 상황의 변화를 믿지 못했다. 그들은 30~35%의 국민이 박근혜 대통령을 맹목적으로 사랑하는 상황에 너무나 익숙했다. 그래서 충격파가 가시면 권력이 다시 돌아올 거라 믿었다. 심지어는 야권조차 그것을 경계했다. 청와대가 총리 임명으로, 검찰수사에 대한 압력으로, 혹은 계엄령을 선포해서 모든 것을 뒤엎으려 시도할 수 있으리란 공포가 팽배했다. 모두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그 대중의 사랑이 다시 돌아올 수 있으리란 전제에서 판단한 것들이었다.

하지만 미망이었다. 처음에 ‘최순실 게이트’는 ‘대통령 절친의 호가호위형 축재 폭로’로 보였다. 그러다가 마침내는 ‘비선 실세의 국정농단’으로 번져나갔다. 그리고 그 실체를 밝히는 과정에서, ‘정치인 박근혜’가 혼자서는 어떠한 정치적 판단도 결정도 내릴 수 없는 이임이 드러났다. 말하자면 박근혜라는 정치인이 허깨비였음이 대중에게 폭로됐다. 성공한 산업화와 경제성장을 가리키는 기호라 믿었던 것은 단지 얼룩, 혹은 낙서에 지나지 않았다.

새누리당 지지층의 상당수도 그 사실을 금방 이해했다. 그들에게 ‘박근혜’는 ‘최씨 일가의 포로이자 꼭두각시’로 보이기 시작했다. 흔히 “형제들에게도 매정한 양반이 아니냐?”라고 했던 그 ‘공적 헌신성’에 대한 옹호는 “박 씨 아닌 최 씨를 가족으로 대우했구나!”란 냉소적 반문 앞에 좌초했다. 결국 10월 말 이후 지지층은 박근혜에 대해 마치 사기 결혼을 당한 것처럼, 잘못된 사업에 친구 보증을 서서 패가망신한 것처럼 분개를 터트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맹목적 짝사랑이 하나의 계기로 인해 종식된 상황, 일종의 ‘콩깍지가 벗겨진 상황’에 해당했다. 그래서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이후 박근혜가 불쌍하다고, 측근비리는 어느 정부에나 있었던 일이라고, 대통령은 최순실에게 속았을 뿐이라고, 그러니 과오가 있더라도 탄핵 사유는 안 된다고 믿는 이들이 15%까지는 결집했다. 하지만 박근혜 정부의 통치가 가능했던 30% 콘크리트 지지층을 회복할 순 없었다. 더구나 과거와는 달리 75~80%가 그를 ‘대통령해서는 안 될 사람’이라고 명확하게 판단하고 반대하고 있었다. 권력이 붕괴됐고, 통치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박근혜와 주변인들은 그 사실을 인정하지도, 이해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박근혜가 모든 정치적 의무를 내팽개치고 청와대에서 제도를 활용한 점거농성을 벌이는 것을 돕거나 방조했다. 하야나 권력 이양의 약속을 하지도 않았고, 검찰조사에 응하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그들을 도울 권력기관이 있지도 않았다. 이 애매한 권력의 공백기는 입법부가 시민의 압력에 굴복하여 탄핵을 가결하고 헌법재판소가 이어받아 대통령 파면을 결정하면서야 종식된다. 2016년 겨울, 광화문 광장을 가득 메운 네 번째 대규모 광장 촛불시위의 역할이었다.

데이터앤리서치 한윤형 부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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