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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규 “대법원, 박종철 열사를 모독한 박상옥 대법관 후보 추천”

민주열사박종철기념사업회 김학규 사무국장 “박상옥 대법관 후보자 왜 안 되는가”

2015-04-06 17:54:26

[로이슈=편집자주] 정치권과 시민사회단체들 뿐만 아니라, 특히 서울지방변호사회(회장 김한규)와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 회장 한택근)과 같은 변호사단체의 강한 반대로 박상옥 대법관 후보자에 대한 국회 인사청문회가 우여곡절 끝에 7일 열릴 예정이다. 임명동의안이 국회에 제출된 지 72일만이다.

그러데 민주열사박종철기념사업회 이사인 김학규 사무국장이 5일 본지에 <박상옥 대법관 후보자 왜 안 되는가>라는 제목의 이메일을 보내왔다. 22페이지에 달하는 마치 한편의 논문과 같았다. 서울대생 박종철군 고문치사사건의 모든 것을 담고 있었다.
김학규 국장은 “박종철 열사를 모독한 박상옥 대법관 후보자 추천”이라며 “어쩌면 이렇게 역사와 국민을 모독할 수 있는가”라고 통탄했다.

하지만 김 국장은 “하늘은 왜 박상옥 당시 수사검사를 대법관 후보자로 추천하도록 내버려두었을까”라는 질문을 던지며 “박상옥 당시 검사를 대법관으로 만들어 우리의 자랑스러운 민주주의 역사를 부정하기 위함일까? 그건 아닐 것이다”라고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김 국장은 그러면서 “그렇다면 무슨 까닭일까. 아마 다른 뜻이 있을 것이다. 하늘은 역사적 사건 ‘박종철군고문치사축소은폐조작사건’이 28년이 지난 지금에도 그 진상이 많은 부분 은폐되어 있는 현실을 안타깝게 여겨 그 실체적 진실을 있는 그대로 들추어냄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온전히 역사의 교훈으로 삼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주려고 그런 게 아닐까”라고 받아들였다.

본지는 김학규 사무국장이 박상옥 대법관 후보자에 대한 인사청문회를 앞두고 보도를 위해 참고하라고 보내 온 글의 전문을 게재하기로 결정했다. ‘박종철군 고문치사 축소은폐조작 사건’의 종합 완결판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내일(7일) 국회 인사청문회를 앞두고 이 사건에 대한 국민들의 이해를 돕고 대법관 임명동의에 관한 판단을 돕기 위해 전문을 게재하기로 결정했다.
다만, 김학규 국장의 글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음을 공지한다.

▲사진=민주열사박종철기념사업회김학규사무국장이미지 확대보기
▲사진=민주열사박종철기념사업회김학규사무국장


===== 다음은 기고문 전문이다. =====

<박상옥 대법관 후보자 왜 안 되는가>

- ‘박종철군 고문치사 은폐조작 사건’의 수사검사로서 그가 한 역할을 중심으로 -
김학규(민주열사박종철기념사업회 이사/ 사무국장)


◇ 들어가며

▲민주열사박종철기념사업회김학규사무국장
▲민주열사박종철기념사업회김학규사무국장
‘박종철군 고문치사 축소은폐조작사건’의 수사검사였던 박상옥을 대법관 후보자로 올린 이번 사태는 지난 35년간의 일제강점기, 분단과 전쟁, 장기간의 군사독재시기를 감내할 수밖에 없었던 우리로 하여금 다시 한 번 과거사 정리의 중요성을 깨닫게 한다. 해방과 함께 마땅히 했어야 할 ‘친일청산’은커녕 그 친일파들의 주도로 시작된 오욕의 역사는 분단과 전쟁으로 이어지면서 대규모 민간인 학살을 양산했고, 독재시기를 거치면서는 민주주의를 요구하며 저항하는 국민들을 학살하고 가혹하게 탄압하는 등 수많은 인권유린 사건을 양산했다. 87년 6월 민주항쟁 이래 우리 사회는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다. 이 과정에서 뒤늦게나마 친일청산을 비롯해서 과거사를 새롭게 정리하려는 노력도 본격화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이 많은 성과를 가져왔음에도 아직도 우리 사회 요소요소에 남아 있는 친일잔존세력, 독재잔존세력의 저항으로 인해 많은 어려움에 봉착해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이러한 어려운 현실은 근본적으로는 우리 사회 민주화의 결정적 분수령이 되었다고 평가되는 87년 6월 민주항쟁이 가지고 있는 이중적 성격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6월 민주항쟁은 분명 군사독재정권에 맞선 민주화운동세력의 승리였지만, 주지하듯이 그것이 결정적 승리로까지 나아가지는 못했다. ‘6․29선언’이 상징하듯 이후의 상황전개는 기득권세력의 기만책이 어느 정도 관철되면서 이루어진 일종의 타협 체제의 지속이었다. 우리는 이를 87년 체제로 부르기도 한다.

이번 ‘박상옥 대법관 후보자 사태’ 역시 크게 보면 이런 87년 체제의 산물로 보인다. 어떤 사람들은 박상옥 대법관 후보자가 과거 박종철군 고문치사 축소은폐조작 사건에서 한 역할을 둘러싸고 ‘고문경찰관을 단죄한 인물’로 미화하기도 하고, ‘막내 검사여서 어쩔 수 없었다’라고 합리화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러한 모든 행위는 친일파가 어느 순간 독립운동가로 변신하여 국립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묻힌다든지, ‘난 친일파라기보다 굳이 말한다면 처자식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일제에 협력한 ‘종천순일파’로 불러달라’며 자신의 친일행위를 정당화하고 합리화한다든지 하는 그 ‘뻔뻔함’, ‘어처구니없음’과 하등 다를 바 없다. 역사가 이렇게 반복되게 해서는 안 된다. 과거사 정리, 역사바로세우기 작업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새삼 절감하는 요즘이다.

◇ 어쩌면 이렇게 역사와 국민을 모독할 수 있는가

1. 박종철 열사를 모독한 박상옥 대법관 후보자 추천

▲뱍종쳘열사
▲뱍종쳘열사
“탁하고 치니 억하고 죽었다”라는 말로 잘 알려진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 그 축소은폐조작 사건은 우리 사회 민주화의 결정적 분수령이 되었던 87년 6월 민주항쟁의 도화선 역할을 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박종철군 고문치사은폐조작사건이 온 국민을 충격과 분노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뜨린 이유는 비단 젊은 대학생을 국가기관인 치안본부에서 갖은 폭행과 물고문을 자행하다가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것에만 있지 않았다. 그러한 만행을 축소은폐조작하여 국민을 속이려는 행위가 경찰 차원을 넘어 검찰과 안기부, 관계기관대책회의와 청와대 등 국가기관 전반을 동원해 전방위적으로 진행했다는 점이 더 큰 반작용을 불러일으켰던 것이다.

당시 검찰 수사팀은 ‘졸속 수사’, ‘짜맞추기 수사’, ‘축소은폐 수사’로 국민적 지탄과 불신의 대상이었다. “검찰이나 경찰이나 똑같다”는 말이 상징하듯 고문을 통해 박종철군을 죽게 한 경찰만이 아니라 이를 제대로 밝히기 보다는 축소은폐하여 전두환군사독재정권의 위기를 모면하게 하는 데 충실히 복무하고자 한 검찰 역시 국민적 분노의 대상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이다.

지금 논란이 되고 있는 박상옥 대법관 후보자는 당시 1, 2차 수사에 모두 참여해서 수사검사로서 사건의 진상을 축소 은폐하는 데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인물이다. 따라서 당시 검찰수사팀의 일원이었던 박상옥 대법관 후보자가 대법관이 된다는 건 박종철 열사를 ‘또 다시 죽이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대법관후보추천위원회(위원장 김종인)가 박상옥 후보자를 추천한 날이 하필 박종철열사 28주기 기일인 1월 14일이었다는 점은 비록 우연이겠으나, 그것이 오히려 박상옥 당시 수사검사를 대법관 후보자로 추천한 사실이 갖는 역사적 의미를 보다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다.

2.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와 인권, 6월 민주항쟁과 6월 민주항쟁에 참여한 수많은 국민들을 모독한 박상옥 대법관 후보자 추천

5공화국 전두환군사독재정권 시절 대표적인 인권유린 사건 중 하나인 박종철군 고문치사축소은폐조작사건의 수사검사가 대법관 후보자로 임명 제청했다는 건 그 자체만으로도 당시 국민적 지탄의 대상이 되었던 전두환군사독재정권의 잔혹한 인권유린 행위에 면죄부를 주겠다는 발상으로 규탄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우리는 28년 전 민주주의와 인권의 소중함을 새삼 깨달으면서 온 국민이 분연히 떨쳐 일어났던 그 감동의 장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다. 87년 당시 우리 국민은 한 젊은 대학생의 억울한 죽음에 대한 슬픔과 분노를 넘어 박종철군의 ‘의로운 죽음’을 기리면서 축소은폐조작의 주범 전두환군사독재정권에 맞서 저 위대한 6월 민주항쟁의 도도한 흐름을 형성해나갔던 것이다. 우리는 더 이상 이러한 자랑스러운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역사를 정면으로 부정하고 모독하는 행위를 용납할 수 없다.

▲사진=민주열사박종철기념사업회김학규사무국장이미지 확대보기
▲사진=민주열사박종철기념사업회김학규사무국장


3. 대다수 법조계 인사들을 모독하는 박상옥 대법관 후보자 추천

박상옥 후보자가 ‘대법관 후보자로서 더없는 적격자’라고 주장하는 것은 법조계에 박상옥 대법관 후보자와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훌륭한 수많은 법조인을 모독하는 행위이다. 단지 법조인이라는 이유로 이런 모독을 감내해야만 하는 분들께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 그러나 실상 대법관이 될 만한 자격이 충분한 분들은 법조계나 법조계 밖에도 많이 있다.

◇ 당시 검찰수사팀과 수사팀의 일원이었던 박상옥 당시 검사는 무엇을 잘못했는가?

1. ‘박종철군 고문치사 축소은폐조작사건’과 관련한 몇 가지 잘못 알려진 신화

2009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위원회’의 결정문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관계기관대책회의 은폐․조작 의혹”이 공개된 이후에도 ‘당시 검찰은 축소은폐조작에 앞장선 경찰과 안기부, 관계기관대책회의에 맞서 수사를 잘 했다’는 잘못된 신화를 계속 믿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있는 모양이다.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이다. 이런 신화가 아직도 위력을 발휘하는 건 황적준 박사(당시 부검의)가 88년 1월에 부검 당시 일기 공개를 통해 박종철군 고문치사축소은폐조작 과정에 사건 당시 치안본부장이었던 강민창이 초기부터 개입했다는 사실을 폭로할 때 안상수 당시 수사 검사가 함께 “관계기관대책회의의 개입으로 검찰로서는 제대로 수사를 할 수 없었다”, “지금도 다 못 털어놔 안타깝다”고 한 언론에 인터뷰함으로써 3차 수사를 통해 강민창을 구속시키도록 하는데 기여한 점, 1994년 안상수가 『안검사의 일기』를 통해 당시 검찰 수사팀이 진실을 밝히기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한 ‘의로운 검사들’로 소개하고, 특히 본인을 ‘고문에 의한 사망’ 사실을 밝혀낸 주역인 양 포장하여 대대적으로 홍보한 게 많은 이들의 뇌리에 아직도 남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더군다나 안상수는 이후 인권변호사로 활약하고, 나아가 ‘박종철군 고문치사사건’ 해결의 주역임을 내세워 국회의원까지 하게 됐으니 그 신화는 현실적 힘으로까지 발전했던 것이다.

그러나 역사적 진실은 위 내용과 많이 다르다. 검찰이 “사건의 진상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음에도 직무를 유기하여 수사를 진행하지 못하다가 국민에게 은폐사실이 폭로된 이후에야 추가 공범을 포함 치안본부 관계자 등 은폐에 가담한 책임자를 최소한만 기소하여 관계기관대책회의의 부당한 개입을 방조하고 은폐한 잘못이 있다”는 것이 역사적 진실에 가깝다. 뿐만 아니라 사건 당일(1/14) 경찰의 시신 화장을 통한 은폐기도를 여러 외압에도 불구하고 이를 막아내고 부검을 이끌어냄으로써 ‘고문에 의한 사망’ 사실을 밝혀낸 주역은 안상수가 아니라 최환 공안부장이었다는 사실도 공식 확인되었다. 안상수는 당직검사(1/15)로 최환 공안부장의 지시에 따라 부검을 집행한 검사였다는 점에서 아무리 좋게 봐줘도 조연에 불과했음이 확인되었다.

이제 이 잘못된 신화는 더 이상 지속되어서는 안 된다. 이는 역사적 사실에도 부합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진실을 왜곡함으로써 많은 이들의 오도된 판단을 유도한다.

물론 ‘고문에 의한 사망’ 사실이 밝혀지는 데는 신성호 기자(중앙일보)를 비롯한 많은 언론인들, 오연상 내과의, 황적준 부검의 등 검찰과 무관한 많은 분들의 공이 모아진 결과였다. 그럼에도 최환 공안부장을 중심으로 한 검찰이 경찰의 시신화장 기도를 막고 부검을 관철시켜 ‘고문에 의한 사망’ 사실을 밝혀낸 것은 분명 ‘잘한 수사’였다. 그러나 이후 검찰이 88년까지 진행한 수차례의 수사는 그 무엇 하나 ‘잘한 수사’가 아니었다. 검찰은 당시에도 국민들로부터 “검찰은 왜 조사하지 않는가”라는 이야기를 듣는 원성과 지탄의 대상이었다. 그럼에도 검찰이 요리조리 피해나갈 수 있었던 건 오로지 권력의 비호 덕분이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이번 ‘박상옥 대법관 후보자 임명동의 제청 사건’은 역설적으로 그동안 은폐되어 왔던 당시 검찰과 검찰 수사팀, 그 수사팀의 일원이었던 박상옥 당시 검사가 어떤 ‘잘못된 수사’를 했는지 제대로 밝히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정말 고마운 일이다. 이제 이를 크게 여섯 가지로 나눠서 살펴보고자 한다.

▲사진=민주열사박종철기념사업회김학규사무국장이미지 확대보기
▲사진=민주열사박종철기념사업회김학규사무국장


2. 당시 검찰수사팀과 수사팀의 일원이었던 박상옥 수사 검사는 무엇을 잘못했는가?

① 자체 직접수사를 포기하고 경찰에 수사를 맡김으로써 경찰의 축소은폐조작을 방조한 검찰

검찰(검찰총장 서동권)은 사건 초기 ‘고문에 의한 사망’ 사실을 밝히는데 핵심역할을 한 최환 공안부장을 윗선(청와대)의 요구에 따라 수사지휘체계에서 배제한다. “그렇다면 특수부에 맡기자”는 최환 공안부장의 요구마저 묵살한다. 이어 검찰은 형사2부에 사건을 맡기면서 신창언 부장검사를 필두로 안상수, 이승구로 내사팀을 가동하여 본격수사에 대비하지만, 17일 오후 “경찰의 명예회복 기회 부여”라는 미명하에 수사권을 사실상 포기하고 경찰 자체 수사에 맡긴다. 서동권 검찰총장은 과거사위원회 조사에서도 ‘스스로 한 결정’이라고 했지만, 관계기관대책회의의 결정에 따른 조치였다. 이미 사건 발생 초기 화장을 통해 진실을 은폐하고자 했고, ‘탁하고 치니 억하고 쓰러졌다’면서 쇼크사로 거짓 발표했던 경찰에게 수사를 맡긴 건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긴 격’이었다. 경찰에게 사건의 축소조작은폐 시간을 충분히 주기 위한 관계기관대책회의의 결정을 그대로 따른 결과였다. 이로써 검찰은 사건 초기 초동수사를 통해 사건의 진실에 보다 용이하게 접근할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포기한다. 결국 경찰은 사건을 축소은폐조작함으로써 조한경과 강진규 2명의 경관에 의해 벌어진 ‘지나친 직무 의욕으로 인한 불상사’로 발표한다.

② 1월 20일에야 본격적으로 1차 수사팀이 움직이지만, 수많은 의혹이 제기되었음에도 ‘지나친 직무 의욕으로 인한 불상사’로 2명의 경찰관만이 관여되었다는 경찰의 거짓 발표를 뒷받침해주는 ‘추인수사’로 일관한 검찰

2명의 고문경찰관이 검찰에 송치되기 직전인 1월 19일 박상옥 당시 검사도 검찰수사팀에 합류한다. 당시 수사팀은 신창언 부장검사, 안상수 검사, 박상옥 검사로 구성된다.(왜 이승구 검사가 빠지고 박상옥 검사로 대체되었는지는 밝혀진 바 없다.) 하루 뒤인 1월 20일 고문경찰관 2명이 수감된 영등포교도소로 출장 수사를 간 수사팀은 안상수가 조한경을, 박상옥이 강진규를 담당하여 23일까지 수사를 계속한다. 박상옥은 이후 함께 물고문에 참여한 인물로 밝혀지는 황OO, 반OO과 기타 관련 경찰들, 최초 목격자 오연상 내과의와 간호사, 그리고 박종철의 하숙집 주인과 하숙집 동료 등 여러 주변 인물에 대한 참고인 조사도 진행한다.

이때 검찰 수사팀은 ‘연행시간이 언제였는지’에 초점을 맞추면서 정작 ‘고문경관이 더 있을 가능성’, ‘윗선이 고문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는지 여부’와 ‘탁하고 치니 억하고 죽었다’는 거짓발표를 하는 등 ‘축소조작은폐 과정에 개입했을 가능성’ 등에 대해서는 확인조차 하지 않거나, 혹은 형식적으로 확인하는 선에서 수사를 마무리함으로써 경찰 수사 결과를 그대로 추인하는 역할에 만족한다. 고문경관도 없는 상황에서 이루어진 현장검증은 현장검증이 아니라 형식적인 ‘실황 조사’에 불과했다. 당시에도 검찰의 이런 조치에 대해 ‘얼굴없는 현장검증’이라며 국민과 언론의 반발이 거셌고, 노승환 의원 외 20명은 “현장검증 공개리 재실시 촉구서”를 제출하기도 한다. 검찰청으로 피의자들을 불러서 조사하는 것이 아니라 영등포교도소로 출장 가서 수사한다는 것 자체가 넌센스였다. 심지어는 나중에 결국 구속되는 경찰 쪽 참고인(황OO, 반OO 등 고문경관과 박OO, 유OO 등 상급자)은 치안본부 대공3부 사무실(남영동 대공분실)에 출장 가서 진술서를 받는다. 심지어 이OO의 경우는 고문에 가담한 5명의 경찰관 중 한 명이었음에도 참고인 조사조차 받지 않은 채 2페이지짜리 ‘자술서’를 받는 것으로 대체해 버리고 만다. 검찰 수사팀은 이미 실체적 진실을 파헤칠 의지도 없었던 것이다. 결국 박상옥도 함께 한 검찰수사팀은 수많은 의혹을 뒤로 한 채, 불과 4일간의 부실 수사를 거쳐 24일 오전에 부랴부랴 수사결과를 발표하고 2명을 기소하는 것으로 마무리한다.

안상수는 『안검사의 일기』를 통해 당시를 회고하면서 “나중에 공범이 더 있었다는 것과 축소은폐조작 부분이 밝혀져 결과적으로 졸속수사였음을 자인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지만 그 당시에는 며칠 더 수사한다고 해서 그 문제가 밝혀질 상황이 아니었다. 사실 조한경, 강진규가 입을 열어 진상을 밝히지 않는 한 공범이 더 있는지 누가 축소은폐조작을 시도했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우리는 제한된 시간에 잠도 거의 못 잔 채 중요한 것은 다 밝혀냈다고 자부하고 있었다.”고 함으로써 마치 당시 검찰수사팀이 최선을 다했지만, “경찰에 감쪽같이 속았던” 양 변명한다.

그런데 이번에 공개된 일부 ‘공판기록’과 ‘수사기록’은 당시 검찰 수사팀의 수사가 단지 부실수사 정도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검찰 수사팀은 고문에 가담한 경관이 정확히 5명이라고 알지는 못했을지라도 최소한 2명이 아니라 더 있을 거라는 점, 사건의 축소은폐조작 과정에 윗선의 개입이 있다는 점 등에 어느 정도 접근했음에도 이를 밝히기 위해 노력하기보다는 의도적으로 외면했음을 뒷받침하는 정황증거가 너무 많이 확인된다.

▲남영동대공분실509호이미지 확대보기
▲남영동대공분실509호


일반적으로 물고문은 4~5명이 한 조가 되어 진행하며 급할 경우에도 최소 3명은 물고문 과정에 참여한다는 점(2차 수사시 황OO 진술조서), 조한경은 1반 반장으로 총괄담당이고 강진규는 4반 소속이어서 이들 둘만이 한조가 되어 물고문을 진행한다는 게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점(2차 수사시 조한경 진술조서), 수사계획서 상에는 박종철에 대한 연행과 조사 담당이 반OO이었기 때문에 박상옥이 강진규에게 “반금곤이 주범인데 왜 강진규가 주범이 되어 있느냐”고 구체적으로 추궁한 사실이 있고, 이때 강진규가 “답변하지 않자 더 이상 추궁하지 않았다”고 법정에서 증언한 사실이 있는데도 1차 수사자료에는 그런 내용을 아예 기록에 남기지 조차 않았다는 점, “물고문 당시 14호실에 있었다”는 황OO과 반OO의 거짓 주장을 뒤집을 수 있는 결정적 인물이었던 참고인으로 조사받고 있던 박종철의 하숙집 동료 ㅎ씨에 대한 ‘참고인 조서’가 지나치게 허술하게 작성되었다는 점(박상옥 담당), 조한경과 강진규가 물고문 횟수에 대해 서로 상반된 주장을 하는 등 물고문 과정에 대해 의심스러운 진술이 많았음에도 그냥 넘어갔다는 점 등은 박상옥을 비롯한 당시 수사검사가 물고문에 가담한 경관이 2명이 아니라 그 이상이었음을 알았음에도 이를 밝히기 위해 노력하기는커녕 이를 덮는데 함께 했다는 유력한 정황증거가 된다.

박상옥 당시 수사검사는 14일 당일 “탁하고 치니 억하고 쓰러졌다”는 허위보고서(최초의 ‘사고발생경위서’) 작성을 주도한 홍OO(5과 1계 계장)에 대해서는 참고인 조사조차 하지 않는다. 안상수 검사는 물이 흥건했던 현장에 달려온 유OO, 박OO 등이 물고문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모를 리 없었음에도 형식적 수사를 통해 면죄부를 준다. 사건 당시 폐쇄회로를 통해 물고문이 이루어지고 있는 현장을 윗선이 미리 알고 있었을 가능성에 대해서도 조한경이 “과장실, 당직실 등에서 볼 수 있는데, 그날 폐쇄회로를 작동하여 타인이 보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라고 진술하고 있었음에도 “폐쇄회로가 어디에 설치되어 있는지도 모른다”는 박OO의 진술, “우리과(5과)와 내 방에는 없고 3층 2과 과장실에 있는데, 기계가 노후되어 현재 사용하지 않고 있다.”는 유OO(5과 과장)의 진술을 일체의 의심도 없이 그대로 수용하고 만다. 현장검증 과정에서 폐쇄회로 시설점검이나 그 작동여부를 확인했다는 기록은 발견되지 않는다.

이러한 사실은 검찰의 1차 수사가 단순한 부실수사 차원을 넘어 경찰의 발표내용을 그대로 추인하는 ‘추인 수사’, ‘짜맞추기 수사’였다는 사실을 증명하기에 충분하다. 검찰 1차 수사팀은 “경찰에 감쪽같이 속은 것”이 아니라 “경찰에 감쪽같이 속아줬던 것”이다. 검찰의 직무유기는 이미 1차 수사 때부터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2월 27일 조한경, 강진규를 통해 ‘고문 경관이 3명 더 있다’는 ‘엄청난 내용’을 들었음에도 상부 보고와 수사계획서 제출 후 5월 18일 김승훈 신부의 폭로가 있을 때까지 그 어떠한 후속 조치도 취하지 않은 검찰

안상수는 이후 『안검사의 일기』를 통해 “범인 3명이 더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는 점에서 검사로서 자존심도 한없이 상했다. 수사기간이 불과 4일뿐이었고 대공분야에서 산전수전 겪은 조한경 등이 워낙 완강히 버텼으므로 나로서는 범인이 3명 더 있다는 사실을 알 수도 없었지만 그것만으로는 나의 무너진 자존심이 되살아날 수 없었다.”라고 변명한 바 있다. 물론 이 변명은 신뢰하기 힘들다. 그런 변명을 설사 수용하더라도 당시 검찰 수사팀의 문제점은 계속 이어진다. 안상수는 2월 27일 조한경과 강진규를 통해 ‘고문경관이 3명 더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곧바로 상부에 보고했고 3월 초에는 수사계획서도 제출했지만, 윗선에서 수사재개 지시가 없어 더 이상 수사를 하지 못했다고 변명한다. 그런데 본인도 이러한 자신의 변명이 늘 찝찝했던지 20년이 지난 2007년 한겨레21과의 인터뷰에서는 “차라리 내가 그때 진실을 폭로했으면 어땠을까”라며 사실상 자신의 잘못을 시인한다.

박상옥 대법관 후보자도 최근 “안상수 검사로부터 3월초에 들었다”면서 2명이 아니라 5명이라는 사실을 당시에도 알고 있었음을 시인한 바 있다. 그러나 3월 12일 여주지청으로 발령난 사실을 근거로 “이후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잘 모른다”는 식으로 회피한다. 그러나 1차 수사가 불과 4일 만에 끝났음을 상기해볼 때 ‘새로운 사실’을 인지한 후 최소 열흘 이상의 시간이 있었다는 점에서 박상옥도 검찰의 직무유기 책임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박상옥 대법관 후보자는 사안의 중대성에 비추어 볼 때 여주지청으로 발령난 이후에도 사태의 추이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을 것이다. 이는 최근 박상옥 후보자측이 내놓은 새로운 해명을 통해서도 사실로 확인된다. 그런데 이번에 내놓은 해명은 최소 두 가지 의혹을 추가로 생산해내고 있다. 하나는 ‘3월 초 추가 공범 인지 후 수사계획서 작성에 함께 참여했다’는 부분인데, 이는 안상수가 『안검사의 일기』에서 “신창언 부장검사와 둘이서 작성했다”고 말한 부분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다른 하나는 “1차 수사 때 공범을 밝히지 못한 게 검사로서 부끄러워 재수사를 못하면 옷 벗을 각오를 했다고 한다”는 해명이다. 3월 초부터 이미 관계기관대책회의의 개입으로 재수사 지시가 계속 내려오지 않는 상황이었고, ‘5월 8일 신창언 부장검사가 조한경 등을 면회한 후 재수사 방침을 최종적으로 포기했다’는 사실을 상기해본다면, 박상옥 검사가 이후 ‘양심선언’은 고사하고라도 ‘사직서 쓰는 시늉’이라도 했는지 좀 더 구체적으로 밝혔어야 했다. 그러나 그러한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진정성이 전혀 읽혀지지 않는 해명인 것이다. 박상옥에게 묻지 않을 수 없다. 당신이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는 동안 ‘옷 벗을 각오’는 물론이고 ‘물고문에 감옥살이까지 온갖 수난을 각오’한 채 진실을 밝히고자 노력했던 안유, 한OO 같은 교도관의 ‘의로운 행동’을 보면 부끄럽지 않은가.

한편 최환 당시 공안부장이 한 증언의 사실여부에 대한 판단을 유보하더라도 당시 언론보도 등을 종합해보면 2월 초순부터 심경의 변화를 일으킨 고문경관이 가족과의 면회 과정에서 3명이 더 있다는 사실을 발설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같은 사실이 교도소를 통해 법무부와 검찰로 이미 보고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바, “2월 27일에 고문경찰 조한경을 면회하는 과정에서 처음 알았다”는 안상수 당시 검사의 증언, “3월 초에 안상수를 통해 들었다”는 박상옥 대법관 후보자의 증언의 사실여부는 아직 확정되었다고 볼 수 없다.

결국 2월 27일 안상수가 조한경, 강진규를 면회하면서 ‘3명이 더 있다’는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된 이후 검찰이 한 역할은 마땅히 했어야 할 사건 수사 재개와 사건의 진상규명이 아니었다. 이 기간 검찰은 무려 4번의 면회를 했다. 그럼에도 검찰이 한 일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그 ‘새로운 사실’을 윗선에 보고함으로써 또는 경찰에 알림으로써 경찰과 안기부를 비롯한 관계기관대책회의가 조한경과 강진규를 회유 협박하도록 도운 것 밖에 없다. 검찰은 심경의 변화를 일으켰던 두 고문경관을 ‘원래 공소내용대로 재판을 받겠다’고 주저앉히는 결정적 역할을 했던 것이다.

김승훈 신부의 폭로 이후 어쩔 수 없이 ‘고문경관이 3명 더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 후에도 축소조작은폐 과정에 윗선이 개입한 사실은 계속 은폐하면서 고문경관 3명을 추가 구속하는 선에서 사건을 마무리하려고 했던 검찰

당시 검찰은 김승훈 신부의 폭로에 대해 처음에는 이를 부인하다가, 곧바로 5월 20일에 2차수사팀(부장검사 신창언, 안상수, 김동섭, 이승구, 박상옥)을 가동하여 추가수사를 진행한다. 이어 다음날인 5월 21일에 곧바로 정구영 서울지검장을 내세워 “고문경관 3명을 추가 구속했다”고 수사결과를 발표한다. 그런데 이날의 수사결과 발표는 말 그대로 거짓투성이였다. “검찰은 5월초에 새로운 사실을 처음 인지하고 수사 중이었다”고 한 말부터 거짓이었다. 검찰은 5월초가 아니라 최소 2월 27일에 처음 새로운 사실을 인지했다. 사건 재수사 역시 전혀 진행되고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2차 수사팀은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의 폭로가 있고 난 이후(5월 20일)에야 부랴부랴 재가동된다. 2월 말에 알았다고 하면 ‘석달 가까이 검찰은 무엇을 하고 있었느냐’는 여론의 비난에 직면할 것이 뻔했기 때문에 이런 거짓말을 했던 것이다. 사건의 축소은폐조작이 “조한경 반장이 주도해서 고문경찰 5명이 공모하여 발생한 일”이라면서 “상급자는 물론 다른 동료경찰관조차 공범은폐사실을 몰랐을 것으로 안다”고 한 말 역시 거짓이었다. 이를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이때까지도 축소은폐조작 과정에 개입한 윗선 문제는 검찰에게도 여전히 은폐 대상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 과정에 박상옥 당시 수사검사는 어떤 역할을 했을까. 5월 20일 신문조서를 보면 그 해답이 나온다. 안상수 검사(조한경 담당)든 박상옥 검사(강진규 담당)든 윗선의 개입문제나 3월 이후 지속된 윗선의 회유협박 문제와 같은 진정 중요한 사안에 대해서는 그 어떠한 질문도 하지 않는다. 조한경, 강진규가 2월 27일 안상수 검사에게, 이어 3월 4일 신창언 부장검사에게 ‘3명의 추가공범이 있다’는 사실을 이미 밝혔음에도 “그러면 왜 지금까지는 허위 진술을 하였나요?”, “그런데 왜 지금에 와서는 진술을 번복하고 있나요”라고 질문하는 등 검찰의 책임 문제로 불거질 가능성이 있는 부분은 아예 왜곡된 답변을 유도한다. 심지어 강진규가 박종철 수사에 참가하게 된 경위를 1차 수사 때와 달리 “사실은 박OO 계장의 지시를 받고 지원하러 간 것이 아니라 위와 같이 조한경 경위가 저보고 전에 박△△ 관계 수사를 하였으니 데려 온 사람에게 박△△ 관계를 물어볼 때 옆에서 도와달라는 말을 하여 따라 가게 되었”다고 했음에도 ‘그렇다면 1차 수사 때 거짓 진술한 이유는 무엇인지’, ‘박OO 계장도 1차 수사시 참고인 진술을 통해 자신의 지시로 박종철 조사에 참가했다고 거짓 답변한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상급자와 어떻게 모의한 것인지’ 등을 추궁했어야 하는데, 그런 모습은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결국 박상옥, 안상수의 이런 축소은폐조작 수사 결과가 21일의 검찰 수사 발표 내용에 고스란히 반영되었던 것이다.

안상수는 이후 『안검사의 일기』를 통해서 “검찰은 급한 불을 꺼야 할 입장이었으므로 일단 고문경찰관들의 주장에 따라 자기들끼리 스스로 축소조작한 것이라고 밝힌 다음 시간을 두고 그 배후나 경위에 관하여 조사해 나간다는 입장이었다”고 둘러댄다. 그러나 이는 검찰의 축소은폐기도를 은폐하기 위한 거짓 알리바이에 불과하다. 21일 수사결과 발표 기자회견 당시 정구영 서울지검장이 기자들과 나눈 일문일답을 보면 검찰이 3명을 추가 구속하는 선에서 또 다시 사건을 덮으려고 했다는 점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당시 정구영 서울지검장은 “앞으로 기소할 때까지의 남은 조사는”이라는 기자의 질문에 “공소유지를 위한 마무리 조사뿐이다.”라고 답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 또 다른 공모자가 밝혀져 사회에 파문이 일어나지는 않을 것인지”라는 질문에는 “내가 전부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수사의 진실은 모두 밝힌 것이라 앞으로 파문은 없을 것이다.”라고 답변하고 있었다. 안상수도 『안검사의 일기』에서 ‘본의 아니게’ 당시의 검찰 내부 상황을 그대로 읽을 수 있는 이야기를 남긴다. “기자회견까지 무사히 마치고 우리는 정구영 검사장 방에서 차를 마셨다. 정 검사장은 자리에 털썩 주저앉으며 일성을 내뱉었다. “이제야 밥을 먹겠다” ...... 그 말은 서익원 차장, 신창언 부장과 나에게도 너무나 가슴에 와 닿는 말이어서 우리는 “예, 이제 우리도 제대로 밥을 먹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고 화답했다. 정말 기나긴 3개월이었고 오욕과 고통의 세월이었다. 그런 뒤 나는 집에 돌아와 세상을 잊은 듯 곯아 떨어졌다. 이제 검사로서의 내 임무는 끝났다. 역사의 죄인이 되지 않은 것만으로도 나는 만족했다.” 이를 통해서도 당시 검찰 수사팀이 윗선 개입 문제를 제대로 수사할 의지가 전혀 없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는 “검찰은 지난 21일 오후 전격적으로 고문가담경찰관 3명을 추가구속한 직후 “더 이상의 확대수사는 없다”고 수사종결을 예고했다.”라고 보도한 한 언론 기사에서도 확인된다.

박상옥이 그렇게 긴박한 상황에서도 앞으로 불거질 수 있는 검찰의 책임 문제(2월 27일 처음 알았다면서 그동안 뭐했냐)를 비롯 은폐할 건 확실히 은폐하는 그 용의주도함은 보는 이로 하여금 혀를 내두르게 만든다. 어쨌든 5월 20일의 고문경관 조한경과 강진규에 대한 신문조서는 그들이 박종철군 고문치사축소은폐조작사건을 수사함에 있어 숨겨진 진실을 밝혀내는 검찰 본연의 임무보다는 국민적 불신에 직면해 있는 검찰조직을 보호하는데 더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 날의 조한경과 강진규에 대한 신문조서는 박상옥을 비롯한 검찰수사팀이 얼마나 비겁하고 비열한 자들이었는가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역사적 기록물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사제단과 국민의 반발로 윗선 개입문제에 대한 수사를 시작하지만, 결국 3명의 윗선 개입으로 마무리하고 축소 은폐 조작의 경찰측 핵심 당사자인 강민창 전 치안본부장은 무혐의 처리하면서 축소은폐조작의 진상을 은폐한 검찰

애당초 5월 18일 발표된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의 성명서에는 “범인조작의 각본은 경찰에 의해 짜여졌으며 현재도 계속되고 있다. 사건조작을 담당하고 연출한 사람들은 .... 전 대공수사 2단장 전OO 경무관, 5과장 유OO 경정, 5과 2계장 박OO 경정, 홍OO 경감 등이다.”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내용은 일체 언론에 보도되지 않는다. 보도지침이 판을 치던 시절 검찰과 경찰, 안기부 등 권력기관에서 ‘명예훼손’ 운운하는 협박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21일 ‘의외로’ 3명이 추가로 구속되는 상황으로 발전하는 걸 보고 언론도 사제단 성명 내용에 대한 확신과 함께 자신감을 얻는다. 좀 더 밀어붙이면 윗선 개입 문제도 밝혀낼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 속에 22일 조간신문에서 과감하게 위 내용을 처음으로 공개했던 것이다. 당황한 검찰은 “22일 오후 당정회의를 계기로” 윗선개입문제 본격 수사로 입장을 급선회한다. “재판 잘못돼 갈 땐 새로운 진상 더 밝히겠다”는 입장을 표명한 김승훈 신부와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의 태도도 검찰에게는 큰 부담이었다. 그러나 이런 검찰의 태도 변화에도 불구하고 “검찰은 도대체 뭐하는 곳이냐. 검찰도 경찰도 똑같다”는 검찰에 대한 국민적 불신은 증폭된다. 견디지 못한 검찰은 결국 27일 대검중수부로 수사주체를 바꾼다. 박상옥 검사를 비롯한 기존 수사팀은 보조 수사업무를 담당하면서 새로 구성된 대검중수부 수사팀을 지원하는 치욕을 감내해야만 했다. 신창언 부장검사를 중심으로 하는 기존 검찰수사팀은 1차 수사에 이어 2차 수사에서마저도 국민적 불신과 지탄의 대상으로 전락했던 것이다.

그러나 수사주체가 바뀌었음에도, 3월 이래 지속된 경찰과 안기부의 조한경, 강진규에 대한 회유협박 과정에 관계기관대책회의가 어떻게 개입했는지 등은 건드리지도 못한 채, 윗선 개입은 박OO, 유OO, 박OO 등 경찰 간부 3명의 책임으로 꼬리를 잘라 이들을 구속하는 선에서 마무리한다. 두 경관을 회유하기 위해 사용된 것으로 알려진 통장에 담긴 총 2억원의 출처를 캐는 문제는 대단히 중요한 사안이었다. 당시에도 ‘안기부 비자금’일 거라는 문제제기가 이미 나오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안기부를 비롯한 관계기관대책회의의 개입 사실을 밝혀내는 중요한 고리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새 수사팀 역시 2억원의 출처를 ‘박OO 치안감 차원에서 경찰 수사공작비에서 마련한 돈’이라고 덮으면서 더 이상 수사를 확대하지 않는다. 강민창 전 치안본부장에 대해서도 “이 사건의 축소조작에 가담한 혐의를 인정할 증거가 없다”면서 ‘혐의없음’으로 처리한다. 지휘라인에 있던 전OO 수사2단 단장과 최초의 허위보고서(초안) 작성을 주도한 혐의를 받던 홍OO(5과 1계장) 역시 ‘혐의없음’으로 처리된다. 전형적인 꼬리 자르기, 봐주기 수사였다.

88년 1월 황적준 부검의와 안상수 변호사의 폭로로 시작된 대검중수부의 재재수사를 통해서도 축소은폐조작의 중심이었던 관계기관대책회의의 실체나 청와대의 개입여부를 밝히는 걸 철저히 외면한 채, 강민창 전 치안본부장 구속으로 사건을 마무리함으로써 축소은폐조작의 중심을 은폐한 검찰

황적준 박사(당시 부검의)의 일기 공개를 계기로 88년 1월에 시작된 재재수사에서도 강민창 전 치안본부장의 구속으로 마무리한 것 역시 검찰의 한계를 다시 한 번 보여준 사건이었다. 이미 1차 수사도 아니고 2차 수사까지 했음에도, 더군다나 2차 수사 중에는 수사팀이 대검중수부로 바뀌는 과정을 겪었음에도 박종철군 고문치사축소은폐조작 사건의 진상을 있는 그대로 밝혀내지 못했다는 건 누가 보더라도 검찰 수사팀의 무능으로만 설명하기 힘든 그 무엇이 있었다. 이미 안상수 당시 수사검사도 “관계기관대책회의의 외압 때문에 검찰이 수사를 제대로 할 수 없었다”고 인터뷰까지 한 마당에 이제 ‘왜 검찰 수사팀이 그렇게 무기력한 모습을 보였는지, 왜 검찰 수사팀이 그동안 진실에 접근하지 못했는지’ 하는 문제를 국민들이 납득할 수 있도록 밝혀내는 일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였다. 이미 당시 언론도 “관계기관대책회의 정체를 밝혀라”, “「축소조작」 묵인 검찰은 왜 조사 않나”며 대검중수부에 강하게 문제제기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대검중수부는 국민적 의혹 내용 중 하나였던 1, 2차 검찰 수사팀에 대한 의혹, 즉 축소은폐조작 과정에 검찰 수사팀이 어떻게 개입 내지 방조했는지 하는 문제는 수사대상에서 제외한다. 관계기관대책회의의 개입문제, 청와대의 개입문제 역시 수사대상이 될 수 없었다. 결국 검찰은 이러한 국민적 문제제기를 2006년에 세워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게 그 책임을 미루고 말았던 것이다.

강민창 전 치안본부장에 대한 수사도 많은 문제점을 남긴다. 대법원에서 결국 파기 환송되지만, 검찰 수사가 얼마나 부실했던지 2심에서 무죄판결을 받는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하기도 한다.

이상 박종철군 고문치사축소은폐조작 사건을 수사한 검찰 수사팀의 문제가 무엇이었는지 살펴보았다. 이러한 검찰의 수사를 어떠한 이유로 ‘잘한 수사’라고 치켜세우는지 정말 이해하기 힘들다. 이러한 검찰의 잘못된 수사가 물론 검찰만의 잘못에서 비롯된 건 아니었다. 그러나 청와대나 관계기관대책회의 등의 외압이 있었다 할지라도 검찰 스스로 수사권을 사실상 포기한 책임은 그 어떠한 이유에서든 합리화될 수 없는 중대한 사안이었다.

물론 이러한 검찰의 모든 잘못에 대해 당시 막 4년차에 접어들었던 박상옥 현 대법관 후보자가 다 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1, 2차 검찰수사팀에 참여하면서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을 축소조작은폐하려는 전두환군사독재정권과 경찰의 기도를 막고 진실을 파헤치기는커녕, 그에 협력한 박상옥 검사의 부끄러운 역할은 결코 작지 않았음을 분명히 하고자 하는 것이며, 그에 상응하는 책임을 요구하는 것뿐이다. 박상옥 검사는 자신에게 주어졌던 박종철군 고문치사은폐조작 사건의 진상을 규명할 수 있는 네 번의 기회(②, ③, ④, ⑤)를 다 포기했다. 포기한 정도가 아니라 축소은폐조작 과정에 ‘사실상’ 협력했다. 그 어떠한 변명으로도 합리화할 수 없는 중대한 사안이다. 박상옥 검사를 비롯한 당시 검찰 수사팀이 직무유기와 범인도피 방조라는 형사책임으로부터도 자유로울 수 없다는 지적은 당시 공판기록과 수사기록을 볼 때 결코 과한 지적이 아니다. 박상옥이 진정 민주주의와 인권, 정의를 수호하는 ‘최후의 보루’인 대법관의 중요성을 안다면 청문회에서 해명하겠다며 회피할 것이 아니라 이상의 지적에 대한 진솔한 해명과 사과를 국민에게 하면서 대법관 후보자를 스스로 사퇴하는 게 도리일 것이다.

3. 박상옥 대법관 후보자, 그는 과연 ‘고문 근절 의지’라도 있었는가

사건 당일인 1월 14일 저녁 경찰의 화장을 통한 은폐기도를 막고 다음날 부검을 실시함으로써 ‘고문에 의한 사망’ 사실을 밝히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최환 공안부장은 처음 경찰이 ‘변사사건 발생보고 및 지휘품신서’를 들고 왔을 때 고문에 의한 사망이라는 걸 직감하고 ‘고문은 절대 안 된다’는 생각으로 서명을 거부하고 외압에도 맞섰다고 했다. 안상수 당시 수사검사는 이후 언론 인터뷰나 『안검사의 일기』 등을 통해 “고문행위는 이 땅에서 영원히 추방돼야 한다”는 입장을 거듭 밝힌 바 있다.

더군다나 안상수는 『안검사의 일기』에서 경찰 자체 수사결과 발표 내용을 비판하면서 경찰의 잘못된 사고를 비판한다. “19일 아침 조한경, 강진규에 대한 조사를 매듭지은 치안본부 측에서 구속영장 신청서류를 가지고 왔다. 영장을 보았더니 가관이었다. 피해자인 박종철의 학생운동 전력과 조사 당시의 혐의사실은 두 페이지에 걸쳐 자세히 기록해 놓은 반면 구속 대상자인 조한경, 강진규에 대한 법죄사실 부분은 한 페이지 밖에 되지 않았다. 주객전도라더니, 경찰측의 본심이 역력히 드러나는 듯했다.”라고 한 부분이 그것이다. 아울러 “이번 사건은 일부 수사관들의 지나친 직무의욕 때문에 빚어진 불상사”였다고 반복적으로 언급한 강민창 전 치안본부장도 비판한다. 또한 1월 23일 남영동대공분실에서 진행된 유OO 5과 과장 등에 대한 참고인 진술을 받을 당시를 회상하면서는 “그곳에서 어떤 수사관에게 “박군은 큰 범죄도 저지르지 않았는데 왜 그렇게 심하게 고문했을까”하고 묻자 그는 “여기 한 번 들어오면 아무런 혐의가 없어도 똥물을 토해 낼 때까지 고문한다. 그래야 바른 대로 말을 할 뿐만 아니라 여기서 있었던 일을 발설하지 못한다”고 했다.”, “어떤 수사관은 동백림사건, 민비련사건, 인혁당사건도 모두 자기 손을 거쳤다고 자랑하였다. 고문으로 사건을 해결했다고 자랑하는 그를 보고 나는 참담한 심정으로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는 기록도 남긴다.

그러나 1월 24일 발표된 검찰의 공소장 내용도 사실 경찰의 발표내용과 크게 차이가 없다. 수배중인 선배 박OO을 검거하기 위해 참고인으로 연행했음에도 사건과 직접 관련이 없는 박종철군의 혐의내용을 장황하게 써놓은 것은 ‘박종철군 연행의 불법성’을 은폐하고 박종철군이 마치 ‘피의자’ 신분이었던 양 기술함으로써 경찰의 고문에 대한 국민적 분노를 희석시키려는 목적이었다. 공소장에 나오는 “서울대민추위 사건의 중요 수배자인 박OO과 연계활동을 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는 대목도 두 고문 경관의 거짓 진술을 그대로 받아 적은 것에 불과했다. 그들이 입수한 정보는 ‘박OO이 지난 11월 24일 박종철 하숙집에 들러 하루 자고 갔다’는 것뿐이었다. 박OO과 박종철은 직접 연계활동을 할 관계가 아니었다. “동인이 사실대로 말하지 않자 사실을 알아내기 위한 위협수단으로” 물고문 했다는 대목 역시 사실과 다른 내용을 담고 있다. 고문 경찰관의 진술에 따르더라도 “박종철은 물고문을 당하면서 ‘박OO이 시내 독서실에서 지내고 있다. 그러나 어느 독서실인지는 모른다.’고 하자 독서실 이름을 구체적으로 진술하라면서 추가로 물고문을 하다가 사망에 이르게 했다”는 것인데, 박종철은 박OO이 있다는 독서실 이름을 알고 있음에도 ‘사실대로’ 자백하지 않았다는 근거는 발견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공소장에 위와 같이 기술한 것은 고문 경찰관의 무모성과 잔혹성을 조금이라도 완화해보려고 한 경찰의 주장을 그대로 수용한 결과였다. 결국 당시 경찰이나 검찰 수사팀이나 공안사건과 고문을 대하는 인식과 태도에 있어 큰 차이가 없었던 것이다.

당시 수사기록에 등장하는 박상옥 당시 수사검사가 꾸민 강진규에 대한 ‘피의자신문조서(1.20)’와 반OO에 대한 ‘피의자신문조서’(5. 21)를 보면 특이한 점이 발견된다. 박상옥 수사검사는 “위 가혹행위가 처음부터 계획된 것이 아닌가요”라고 묻고 강진규는 “박종철이 박OO의 행방과 조직에 대하여 계속 답변을 회피하므로 겁을 주기 위하여 그와 같은 행동을 하였지 처음부터 계획적으로 고문하여 자백을 받아내려고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라는 답변을 이끌어내 계획적이지 않고 우발적이었다는 변명을 그대로 수용한 후, “피의자에게 유리한 진술이나 증거가 있는가요”라는 질문을 마지막으로 한다. 이에 대해 강진규는 “하루 빨리 위와 같은 좌경조직이 와해되어 국가발전이 이룩되었으면 더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라는 답변을, 반OO은 “이 땅에 공산주의가 발을 붙이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제 희망이고 제 상사들에게도 더 이상의 누를 끼치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라는 답변을 내놓는다. ‘나라를 위해 충성하다 벌어진 일이니 이 점을 충분히 감안해 달라’는 취지의 답변으로 보이는데, 이걸 그대로 받아 적으면서 피의자 신문조서를 마무리한 것으로 보아 박상옥의 심정도 고문경관과 마찬가지였던 것으로 보인다.

박상옥이 고문 근절 의지를 별로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할 기회는 2차 수사에서도 발생한다. 박상옥을 비롯한 2차 수사팀은 황OO, 반OO, 이OO를 조사하면서 조한경과 강진규가 “고문을 즐겨 사용하는 전문가”라는 진술을 받아낸다. 박종철군고문치사 사건에서 발생한 고문이 우발적인 것이 아니라는 진술을 확보한 셈이었다. 그럼에도 이후 이를 확인하는 실제적인 조치는 취하지 않는다. 기껏 “고문 전문가로 통한다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 정도의 상투적 질문만이 있을 뿐 “전혀 사실이 아니다”는 답변을 얻어낸 후에는 더 이상 추궁하지 않는다. 만약 박상옥을 비롯한 2차 수사팀이 ‘고문 근절 의지’가 확고했다면 과거 이들이 담당한 사건 수사에서 고문을 사용했는지 여부를 확인했어야 했다. 그게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조한경과 강진규는 물론 황OO과 반OO 등이 최근 담당했던 사건 수사 관련 피의자 중 단지 몇 명의 진술만 들었어도 이는 쉽게 확인할 수 있는 사안이었다. 결국 이러한 검찰 수사팀의 잘못은 조한경 등이 이후 재판과정에서 “박종철에 대한 고문 말고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고문해 본 적이 없다.”는 뻔뻔한 진술을 하도록 용인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박상옥을 비롯한 검찰 수사팀에겐 고문 근절 의지조차 없었다고 밖에 볼 수 없는 또 다른 대목이다. 박상옥은 최소 한 ‘간첩이나 좌경세력은 고문을 해도 된다’, ‘경찰이 수사를 하는 과정에서 불가피할 경우 고문이라는 방법을 사용할 수 있다’, 이런 인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박상옥을 비롯한 검찰수사팀이 박종철군고문치사 사건과 같은 역사적 사건을 직접 수사했음에도, 국민과 언론 등에서는 이미 고문 근절 요구가 빗발치고 있는 상황에서도 고문 근절 의지가 없었다는 점은 실로 충격이다. 박상옥이 역사적인 박종철군고문치사 사건의 수사 검사를 맡았음에도 이를 계기로라도 ‘고문 근절 의지’를 확고히 하지 못했다는 걸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는 사건이 5년 후 발생한다. 박상옥 검사는 92년 부산지검 근무시절, 길 지나가던 무고한 시민을 강도 피의자로 몰아 파출소로 연행한 후 반인륜적인 물고문을 벌인 경찰관에 대해 피해자와 합의했다는 이유만으로 피의자를 불구속 수사하는 충격적인 조치를 취한다. 박종철군고문치사 사건같은 역사적 사건을 담당했으면서도 ‘반인륜적인 고문’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았던 한 검사가 취할 수 있는 ‘충분히 가능한’ 선택이었던 것이다.

◇ 몇 가지 남는 반론에 대한 입장

1. 안상수는 박종철기념사업회 운영위원까지 했고, 과거(1995) 인세수입 1천만원을 기념사업회에 기증하기도 했다?

가슴 아픈 일이지만, 사실이다. 안상수 당시 검사는 이후 인권변호사로 활동하는데, 한 때 박종철기념사업회의 운영위원까지 한다. 안상수 당시 검사가 88년 1월 강민창 전 치안본부장을 구속하는데 일정한 역할을 했던 게 사실이고, 자신이 고문사실을 밝혀낸 주역인 양 행세하면서 부실수사나 축소은폐조작 과정에 대한 본인의 책임을 “외압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 변명했는데, 유족과 기념사업회 관계자들이 여기에 감쪽같이 속은 결과였다. 안상수 당시 검사는 이후 『안검사의 일기』를 통해 자신의 알리바이를 더욱 더 구체화하고 체계화한다.

그러나 ‘고문에 의한 사망’ 사실을 밝힌 진정한 주역 최환 당시 공안부장이 2000년대 접어들면서 언론을 통해 새로운 증언을 하기 시작하면서 “안검사의 신화”는 흔들리기 시작한다. 기념사업회 관계자는 이때도 긴가민가했다. 공안부장 출신의 증언을 그대로 수용하기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박종철기념사업회는 결국 2009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위원회의 결정문,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관계기관대책회의 은폐․조작 의혹”이 나오면서 새롭게 입장을 정리한다. 화장을 막고 부검을 관철하여 ‘고문에 의한 사망’ 사실을 밝혀낸 주역은 안상수가 아니라 최환이라는 사실, 안상수는 축소은폐조작의 총괄기관이었던 관계기관대책회의의 검찰측 실무책임자로 사건처리 방침에 대한 논의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인물이었다는 사실, “안검사의 일기”를 통해 그렇게 “관계기관대책회의의 개입문제를 밝혀야 한다”고 주장했음에도 막상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위원회”가 그 사실을 밝히려고 조사에 나서자 이에 협력하기는커녕 적극 회피했다는 사실 등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념사업회의 입장변화를 확인할 수 있는 사건이 발생한다. 2011년 3월초 안상수 당시 검사는 출판기념회를 열고 『안검사의 일기』를 제목만 바꿔서 『박종철열사와 6월민주화운동』으로 다시 발간하는데, 이때 또 다시 “인세수입은 유족과 박종철기념사업회에 기증하겠다”고 밝힌다. 언론 보도를 통해 이 사실을 알게 된 박종철기념사업회는 곧바로 “당신네들만의 잔치판이라 그리도 뻔뻔합니까? - (사)민주열사박종철기념사업회는 안상수 한나라당 대표의 인세수입 기증을 거부합니다.”라는 제목의 반박 성명을 발표한다. 이는 곧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된다. 이에 대해 안상수는 그 어떠한 변명이나 해명도 없이 침묵으로 대신한다.

▲사진=민주열사박종철기념사업회김학규사무국장이미지 확대보기
▲사진=민주열사박종철기념사업회김학규사무국장


2. 신창언 부장 검사는 이후 헌법재판관까지 했다?!

당시 1, 2차 검찰 수사팀 팀장, 신창언은 1994년 9월 민자당 추천 몫으로 헌법재판관이 된다. 그러나 당시는 인사청문회 제도가 없던 시절임을 감안해야 한다. 아울러 당시에도 이미 신창언 부장의 헌법재판관 임명에 박종철군 고문치사축소은폐조작사건의 수사 검사였다는 이유를 들어 반대하는 목소리가 참여연대,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을 통해 강하게 나왔었다는 점 역시 주목할 필요가 있다. 민변은 “박종철 사건과 관련이 있는 신창언 씨 등의 추천으로 절망을 느낀다.”고 논평했고, 참여연대는 “문제인사들의 임명이 확정될 경우 우리는 임명이 철회될 때까지 시민 반대운동을 펼쳐나가겠다”고 밝히기도 한다. 당시에 만약 인사청문회 제도가 있었다면 과연 신창언 부장 검사가 헌법재판관에 임명되었을까? 아마 그렇게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 마치며

하늘은 왜 박상옥 당시 수사검사를 대법관 후보자로 추천하도록 내버려두었을까. 박상옥 당시 검사를 대법관으로 만들어 우리의 자랑스러운 민주주의 역사를 부정하기 위함일까? 그건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무슨 까닭일까. 아마 다른 뜻이 있을 것이다. 하늘은 역사적 사건 ‘박종철군고문치사축소은폐조작사건’이 28년이 지난 지금에도 그 진상이 많은 부분 은폐되어 있는 현실을 안타깝게 여겨 그 실체적 진실을 있는 그대로 들추어냄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온전히 역사의 교훈으로 삼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주려고 그런 게 아닐까. 그렇다면 박상옥 대법관 후보자 추천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한 모든 분들에게 감사드릴 일이다. 이제 국회가 해야 할 일은 박상옥 대법관 후보자의 적격여부를 따지는 ‘청문회’가 아니라 아직도 은폐되어 있는 박종철군 고문치사축소은폐조작 사건의 진상을 있는 그대로 밝혀내 껍데기가 여전히 판치고 있는 현실을 극복하는데 힘을 보태는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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