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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부 독립 초석…가인 김병로 선생 연수관 첫 삽

대법원, 전북 순창 생가 주변에 ‘가인연수관’ 건립…내년 6월 완공

2009-02-13 12:45:15

초대 및 제2대 대법원장을 역임하며 대한민국 건국과 일제강점기 민족정기 구현에 큰 족적을 남긴 가인(街人) 김병로(1887~1964) 선생을 기리는 ‘가인연수관’이 전북 순창에 세워진다.

'가인 연수관' 조감도
대법원은 12일 가인의 생가인 순창군 복흥면 답동리에서 이용훈 대법원장과 가인의 손자인 김종인 전 청와대 경제수석, 윤영철 전 헌법재판소장, 김완주 전북지사 등이 수백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가인연수관’ 기공식을 열었다.

이용훈 대법원장은 치사에서 먼저 “가인 선생은 일제강점기에 변호사로 활동하며 독립운동가와 애국지사들의 변론에 앞장섰고, 거족적 민족운동단체인 신간회의 중추로도 활약했다”며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는 초대 대법원장에 취임해 식민사법의 잔재를 청산하고 사법부 독립의 기틀을 마련했다”고 말했다.

또한 “우리 민법과 형법 등 기본법의 제정 과정에서도 큰 자취를 남겼고, 그 분이 평생 보여 준 애국애족의 정신과 올곧은 삶의 자세는 사법부 구성원들을 물론 나라를 사랑하는 후세 모두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고 가인의 높은 뜻을 기렸다.

이어 “연수관이 설립되면 전국의 법관과 법원공무원들이 가인 선생을 본받아 국민을 섬기는 공복으로서의 자세를 가다듬고 업무수행의 질을 높이는데 필요한 지식과 역량을 키우는 학습과 재충전의 장이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실제로 정부는 지난 1995년 근대사법 100주년을 맞아 가인 선생께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했고, 법원에서도 추모 강연회를 개최하는 한편 가인 선생의 흉상을 제작해 설치하기도 했다.

연면적 8만여㎡의 부지에 지하 1층, 지상 4층의 규모로 건립되는 연수관은 선생의 유품과 관련 자료들을 모은 전시관 외에도 법관과 직원들의 연수를 위한 숙소, 강의실, 세미나실 등 최신 시설이 마련된다.

이 대법원장은 또 “우리나라의 경제 규모는 이미 세계 10위권에 이르렀으나, 불행히도 낮은 사회적 청렴도로 말미암아 공적 권위의 정당성과 공정성을 부정하는 현상이 끊이지 않고 있다”며 “‘사법 종사자에게 굶어 죽는 것은 영광이다. 부정을 범하는 것보다 명예롭기 때문이다’라고 하신 가인 선생의 말씀을 되새기게 된다”고 회고했다.

아울러 “평생 원칙과 대의를 저버리지 않고 법치주의 구현의 근간인 사법부의 독립을 지켜내기 위해 일신의 안일을 과감히 내던졌던 생전의 모습을 마음에 떠올려 보게 된다”며 “오늘 첫 삽을 뜨는 가인연수관이 선생의 나라와 민족에 대한 사랑과 선생께서 우리 사법부에 남긴 발자취를 다시 발견하고 널리 전파하는 소중한 터전이 되도록 우리 모두 힘과 지혜를 모을 수 있기 바란다”당부했다.

가인 김병로 선생과 생가(우측)
◆ 가인 김병로 선생은 누구?


대법원에 따르면 가인 선생은 1887년 12월15일 전라북도 순창에서 사간원 정언을 지낸 부친 김상희와 장흥 고씨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선생은 러일전쟁 중 목포에 정박 중인 일본군함을 보고 신학문의 필요성을 절감, 담양 일신학교에서 서양인 선교사로부터 산술와 서양사 등을 배웠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된 뒤 선생은 전북 태인에서 거의한 최익현 의진에 가담했고, 의진이 해산된 이후에는 순창의 김동신 의진에 참여해 활동했다.

일제의 호남대토벌작전으로 의병활동이 어려워지자 가인 선생은 고정주가 설립한 창흥의숙에서 수학했다. 이후 1910년 일본으로 건너가 명치대학과 일본대학 법과에서 공부하다가 귀국했다.

1912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명치대학과 중앙대학 고등연구과에서 수학했고, 일본유학 중 재동경조선유학생학우회 기관지인 ‘학지광’의 편집을 담당하는 등 민족계몽운동에도 힘썼다.

1915년 귀국해 보성전문학교 등에서 후학을 양성했고, 1919년 경성지법 변호사로 개업했다. 1923년 선생은 형사변호공동연구회를 설립해 김상옥 의사 사건, 광주학생 사건, 수양동우회 사건 등 이른바 시국사건 즉 독립운동사건을 무료로 변론했다.

또한 안창호 등 민족운동가와 관련된 사건의 변호도 맡아 그들의 입장을 적극적으로 옹호했다.

선생은 교육에 대한 남다른 관심으로 조선교육협회 창립발기인, 보성전문학교 상임이사 등을 맡았으며, 1923년에는 조선민립대학기성회의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또 선생은 분열돼 있던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세력의 통합에도 노력, 1927년 민족협동전선으로 신간회가 창립되자 이에 가입했고 1929년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현지를 방문하고 진상을 조사, 일제의 부당한 처사를 비판했다.

이듬해에는 중앙집행위원장을 맡아 신간회를 이끌었고, 1945년 광복 후에는 남조선과도정부 사법부장(1946), 대한민국 초대 대법원장,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특별재판부 재판관장을 맡아 대한민국 건국과 민족정기 구현에도 큰 족적을 남겼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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