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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생 “판사가 잘못하면 어떻게 되나요”…중견 법관 자성

유해용 제천지원장, 병원 다니다 느낀 법원 문제 자성 눈길

2005-10-30 22:00:39

초등학생이 10년 이상 법관 생활을 한 베테랑 판사에게 ‘의사가 잘못하면 책임을 지는데, 판사가 잘못하면 어떻게 되나요’라고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할까.

단골손님까지는 아니더라도 심심찮게 병원을 찾는 ‘종합병원’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청주지법 유해용 제천지원장이 병원 대기실에 앉아 차례를 기다리며 병원이 돌아가는 모습과 법원에서 하는 일을 비교하며 자성하는 글을 대법원이 매월 발행하는 <법원사람들> 10월호에 ‘병원에 가는 판사’라는 제목으로 기고해 눈길을 끌고 있다.
유해용 제천지원장은 우선 “사람들은 흔히 가운을 입고 일하는 세 가지 직업 ‘성직자, 의사, 판사’를 함께 놓고 비교해 말하는데 이들 직업이 갖는 사회적 책임과 업무의 공익적 성격 때문에 이들의 부정과 비리, 실수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강한 비난의 대상이 된다”고 운을 뗐다.

유 지원장은 이어 “급변하는 세상에 달라지지 않은 것이 있다면 남의 정신과 영혼을 어루만지는 성직자, 생명을 다루는 의사, 세상의 시시비비를 가리고 남을 심판하는 판사에게 고도의 공익성, 청렴성과 도덕성을 요구한다는 것”이라며 “이것이 성직자, 의사, 판사들에게 적지 않은 부담감으로 다가올 수도 있지만 물질주의의 이기심이 팽배하고 탁류가 휩쓰는 세상일지라도 누군가는 양심과 정의와 숭고한 인간정신의 수호자가 돼 주기를 바라는 간절한 기대 때문일 것”이라고 풀이했다.

그는 또 대기시간에 대해서도 공감을 표시했다. 유 지원장은 “병원에서 대기시간이 긴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고, 시간예약을 지키지 못하는 경우가 다반사이지만 의사가 놀고 있기 때문에 진료가 지연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원망하게 된다”며 또한 “초조하게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데 누군가가 불쑥 차례를 어기고 먼저 진료를 받는 장면을 목격하면 ‘누군 시간이 남아 이렇게 기다리고 있는가’라는 분노가 치밀어 오르게 된다”고 말했다.

유 지원장은 그러면서 “최근 법원에서 ‘시차제 기일지정’을 통해 재판 대기시간을 줄이려고 노력하지만 지루하게 순서를 기다리는 당사자들은 마찬가지 불만을 갖을 것이며, 변호사가 선임된 사건을 먼저 진행하는 관행에 대한 비판도 이런 맥락에서 보면 십분 이해가 간다”며 “아무리 사소할망정 사람마다 자기 병이 가장 중요하고 긴급한 문제인 것처럼 약식명령이나 소액사건이라고 함부로 무시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덧붙였다.
뿐만 아니다. 유 지원장은 “의사 앞에 서면 주눅이 들어 궁금한 것을 물어보고 싶어도 괜히 핀잔이나 들을까봐 주저하게 돼, 정작 나의 문제인데도 돌아가는 상황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 내가 내 돈 내고 진료 받는데 왜 이렇게 위축될까 하는 생각도 든다”며 “자기가 낸 세금으로 법원을 짓고 법원공무원에게 봉급도 주는 국민이 재판과정에서 이런 느낌을 갖는다면 어떤 눈으로 법원을 바라보게 될까”라고 법정에 오는 당사자들의 심정을 헤아렸다.

그는 자신이 종합병동으로서 느낀 것처럼 “불안하고 긴장된 상태에 있는 환자에게 의사나 간호사의 친절하고 따뜻한 말 한마디 자체가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모른다”며 “초조하고 절박한 심정으로 법정에 온 당사자의 입장에서도 ‘아버지 같은’ 포근함을 주는 판사가 고마운 것은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판사의 자세를 강조했다.

그러나 유 지원장은 진료와 재판에 다른 점도 있다고 꼬집었다. 그는 “명의(名醫)가 있는 곳이면 전국 어디나 찾아가 진료를 받을 수 있지만 재판은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관할’이라는 이름으로 정해둔 법원에서 특정재판부에 사건이 배당되면 싫든 좋든 그 판사에게 자기 운명을 맡길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특히 유 지원장은 “의료과실로 인한 손해배상책임과 법관의 잘못된 재판에 대한 손해배상책임의 차이는 여전히 논쟁거리인데 언젠가 법원에 견학 온 초등학생들과 대화하면서 ‘의사가 잘못하면 책임을 지는데, 판사가 잘못하면 어떻게 되나요’라는 질문을 받고 조리 있게 설명하기가 곤란해 난감했던 적이 있다”고 고백했다.

그는 그러면서 “사법권의 독립 보장, 악의적 당사자의 끊임없는 중상모략으로부터 보호, 상소제도를 통한 사법권 남용의 견제 기능 등 법관의 재판권 행사에 대한 면책을 설명하는 여러 가지 논리들이 일반 시민들에게 얼마나 설득력이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유 지원장은 끝으로 “병원 문을 나설 때마다 다시는 병원신세 지지 말아야지 다짐하는 나처럼 법정 밖을 나서는 많은 사람들 특히 형사재판의 피의자·피고인들이 이와 비슷한 굳은 마음가짐으로 아름답고 값진 인생을 살기를 기도한다”며 글을 마쳤다.
◈ 유해용 제천지원장 주요 약력

유해용(柳海鏞) 제천지원장은 66년 경북 포항(영일) 출신으로 보성고와 서울법대를 나와 제29회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지난 93년 서울지법 북부지원 판사를 시작으로 서울지법 판사, 울산지법 판사, 미국 하버드대학교 연수, 서울지법 판사, 서울고법 판사 겸 법원행정처 송무심의관, 서울고법 판사를 거쳐 올해 2월부터 청주지법 제천지원장으로 일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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